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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콘] 세상을 바꾼 그녀들 시즌 3 장현선 대전여민회 대표

‘따로 또 같이’ 실천으로 여성운동 지평 확대해

내년 창립 30주년 맞아 역사편찬 기획
30년만의 ‘홈커밍데이’ 준비하고 있어
여성운동 지평 확대위한 조직 분화 후 
새로운 여민회 위상 재정립

 

‘사람 잡던’ 올해 여름 폭염이 드라마틱하게도 하루 만에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 날, 충남 계룡산 초입 동학산장에서는 2016년 여성연합 정책수련회와 3차 이사회가 열렸다. 시끌벅적했던 비전논의를 뒤로 하고 1박 2일 일정이 모두 끝난 후 대전여민회 장현선 상임대표와 마주앉았다. 헤어짐이 아쉬워 긴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의 분주함 속에서도 장 대표는 예의 그 차분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현선 대표 인터뷰 사진 1.JPG

 

“날짜 계산을 잘못 했다”

2012년 상임대표에 취임한 장현선 대표는 임기 마지막해인 내년에 대전여민회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어깨가 무거우시겠다’는 말에 “날짜 계산을 잘 못 했다”며 진심인 듯, 농담인 듯 웃음을 지었다. “날짜 계산을 잘못한 것 같아요. 저는 대표직을 올해까지만 하고 새 대표들이 30주년을 담당하는 줄 알았는데 따져보니 아니더라고요.”(웃음)
2008년부터 상근활동을 시작한 그는 활동 4년 만에 상임대표가 됐다. 파격적인 승진이다. 1994년부터 회원활동으로 대전여민회와 연을 맺은 ‘순수’회원 출신으로 상임대표가 된 모범적인 케이스다. 
“제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대표가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대전 지역의 거의 유일한 여성단체였던 대전여민회가 1990년대 후반부터 분화를 시작했어요. 인권, 평화, 풀뿌리, 정치 등 커다란 사업 덩어리들이 모두 독립해서 나가고, 제가 담당하고 있던 여성가장사업과 성평등 의제 사업만 남았지요. 제가 대표를 맡을 즈음 거의 분화가 다 이뤄져서 남아있던 사업을 맡고 있던 제가 대표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분화, 더 큰 꿈을 꾸기 위한 ‘도원결의’

1987년 창립한 대전여민회(창립 당시 충남여민회)는 30년 간 대전 지역 여성운동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인권, 평화, 정치, 풀뿌리, 노동 등 거의 모든 의제를 다루면서 조직은 커져갔고, 지역사회에서 여민회라는 이름은 무게감을 더해갔다. 
“영역별로 덩치가 커지다보니 회의를 한 번 하려고 해도 사업보고만 1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효율성은 떨어지고, 부문별로 자기 사업에 집중하면서 다른 사업에는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어졌죠. 그리고 여민회라는 ‘네임 브랜드’가 지역에서는 고정적이었어요. 그러다보니 각 특성에 맞는 활동들을 활성화하기에는 여민회라는 이름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전문화하고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 여민회라는 우산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분화하는게 여성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판단한 거죠.”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정치네트워크, 평화여성회, 여성인권티움, 풀뿌리 등 대전여민회 위원회별 사업이었던 영역들이 1990년대 말부터 하나씩 독립 단체로 분화해 나갔다. 독립에 필요한 재정과 장소 등 기본적인 살림은 여민회가 마련했다. 회원들도 분리했다. 안정적인 원 조직을 떠나 개별 단체로 독립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 대표의 표현대로 구성원들의 ‘더 큰 꿈을 꿔보자’는 ‘도원결의’ 같은 결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분화의 당위성에 대해 합의를 했으면, 분화가 가능하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게 재정이잖아요. 여성정치네트워크의 경우 1년 동안 여민회에서 상근자 활동비도 지원했어요. 또 분화만으로 끝난 게 아니라 분화를 실제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연대체가 필요했죠. 그래서 대전여성단체연합을 만든 거에요. 대전여성연합도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여민회가 지원했습니다.”

장현선 대표님 사진(대전여민회 1)-crop.jpg

<2014년 대전여민회 후원의 밤>

 

‘30년 만의 홈커밍 데이’ 준비중

대전여민회라는 큰 울타리에서 벗어나 전문적인 개별 조직으로 독립한 단체들은 2012년 대전여성단체연합이라는 새로운 우산조직을 꾸렸다. 여성운동 단체들의 대표성과 주도성을 갖는 구심체가 필요했던 이유다. 장 대표는 “분화를 시작할 때 대전여성연합 창립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여민회가 분화의 모태는 될 수 있지만, 분화 후 또 다른 구심체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개별단체로서의 여민회를 이미 상정하고 분화를 시작했지요. 여민회는 여민회라는 이름의 정통성과 상징을 가질 뿐, 여민회의 이름으로 여성연합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대전여연은 지역에서 대표성을 갖고 관과의 거버넌스에서도 중요한 카운터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민회가 갖고 있던 과대대표성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서 덜 부담스럽지만 아직도 대전여민회라는 이름의 무게가 부담이 되긴 합니다.”
독립하는 단체들에 한 살림씩 떼어주고 난 후 여민회는 새로운 ‘대전여민회’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고심했다고 했다. 지역에서 여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대전여연에 넘겨주고 단일한 조직으로 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여민회에 대한 기대감이 새로운 여민회의 위상을 고민하게 했다. 
“‘여성가장사업만 해도 된다’는 의견과 ‘지역에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여성의제를 여민회가 받아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어요. 고민 끝에 여성노동 부문과 성평등 의제 부문에 좀 더 힘을 기울이자 해서, 성평등 강사 양성 과정과 여성주의 강좌를 다시 만들고, 지난해부터는 고용평등상담실 운영을 재개해 지역에서 여성노동 관련 사안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내년 여민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역사편찬위원회를 꾸렸다. 20주년에 하지 못했던 여성운동 역사서를 이번에는 꼭 편찬할 계획이다. 
“기억을 모으고 있어요. 창립부터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해왔고, 역대 어떤 대표, 어떤 활동가, 회원들이 있었는지, 무엇을 목표로 지난 30년을 이끌어 왔는지 집대성할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부족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서 집담회를 열어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역사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장현선 대표는 ‘30년 만의 홈커밍데이’를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여민회를 거쳐 간 선배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끊어진 연결고리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아직 찾아뵌 분이 그렇게 많진 않지만 대부분 반가워하셨어요. 선배들이 모두 여민회를 ‘친정같다’고 하셔요. 본인이 지금의 활동을 하게 된 시작이 여민회였고, 여민회 경력이 발판이 되어 지금의 일을 하게 됐다면서요. 창립 30년을 맞아 선후배가 함께 모여 서로에게 힘을 주고 받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장현선 대표님 사진(대전여민회 2)-crop.jpg

<2014년 성평등강사양성과정3기 수료식>@대전여민회

후배들이 인정하는 롤모델 되고파

80년대 초반 부산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장현선 대표는 여느 80년대 학번처럼 치열하게 그 시대를 지나왔다. 장 대표가 여성운동과 인연을 맺은 건 결혼 후 부산을 떠나 대전에 정착한 후였다. 집 근처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보고 참여했던 지역 프로그램이 여민회와의 첫 만남이었다. 동화 읽는 모임, 아나바다 운동 등 회원 활동을 시작한 그는 상근활동을 거쳐 대전지역 여성운동의 중심에 섰다. 
“대전 지역 여성운동 1세대들이 지금 이 현장을 떠나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들 하고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후배들이 인정할만한 롤 모델로서 당당하게 사회로 진출했으면 좋겠는데 준비가 안된 것 같아요. 현장에 집중하고 정신없이 뛰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인프라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때늦은 후회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교육받으러 갈 때 추천서도 써주고 격려도 해줬는데 정작 스스로는 너무 준비를 못했구나 싶기도 하고요. 활동가 출신의 대표들이 많이 갖고 있는 고민일 겁니다.”
장 대표는 후배 활동가들이 ‘여기서 열심히 활동하면 나도 저 선배처럼 할 수 있겠다’는 비전을 가질 수 있는 선배가 되기 위해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고 했다. 


글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

사진 : 도구 여성연합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