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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콘] 세상을 바꾼 그녀들 시즌 3 김경영 경남여성회 대표
 
“나는 여성운동 선배들의 열매”
 
 
경남여성회, 마산지역 최초의 진보적 지역여성운동단체
시민사회운동의 산실, 지역여성운동의 모태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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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성회의 지난 30년의 핵심 성과는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현장에서 제대로 실천해 가는 거였어요. 앞으로도 이런 핵심 정신을 살려가는 게 우리의 주요한 방향일 것입니다.”
2016년 창립 30주년을 맞은 경남여성회는 1980년대 중반 관변 여성운동이 판을 치던 마산 지역에 진보적 지역여성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민주화의 열기가 뜨겁던 당시 경남여성회는 각 부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지역사회에 시민단체들이 설립되는데 모태 역할을 했다.
김경영 경남여성회 회장은 경남여성회 30년의 성과를 여성주의에 대한 공부와 실천이라고 짚었다. 소모임으로 시작한 경남여성회는 의식화를 위한 공부가 주요한 동력이었다. 1985년 크리스천아카데미에서 실시한 ‘여성지도력 개발과정’에 참여한 마산지역여성들이 여성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하면서 여성학 모임을 꾸려나갔다. 매월 2,4주 월요일마다 열린 여성학 모임은 경남여성문화연구회의 전신인 ‘월요회모임’이 되었고, 경남여성문화연구회는 이후 경남여성회가 되었다.
노동상담, 언론계, 시민단체, 주부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로 꾸려진 경남여성회는 초창기부터 여성학이라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이론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현실화시켜 나갔다. 각기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부조리함과 부정의에 대해 인지하고 토론하면서 조직화되어 간 것이다.
경남여성회는 학교 촌지거부운동을 주도하면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가 설립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고, 가족법, 가정폭력반대운동을 하면서 가정법률상담소 탄생에 일조했다. 또한 페놀 사태에 대한 문제점을 폭로하고 지역사회 여론화를 만들어가며 환경운동단체가 태동하는데에도 역할을 담당했고,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가는 한살림의 창립시기에 경남여성회 회원들이 다수 참여하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는 경남여성회 창립에 대해 운동을 분열시키는 분파주의 행위라고 욕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경영 대표는 “시위 때 경찰 검문을 피하려고 여성회 선배들이 기저귀 가방에 유인물 넣어서 돌리면서까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며 항변했다.

 

노동운동가에서 여성운동가로
 
김경영 대표는 경남여성회가 마산에서 창원으로 공간을 옮기고 난 후 경남여성회에 합류했다. 시민사회운동의 산실로 여러 영역에서 활동하던 경남여성회는 1997년 1월 창원시로부터 남산복지관을 위탁받으면서 마산 생활을 접고 창원으로 터전을 옮겼다.
“창원으로 공간을 옮기면서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여성들을 만날 공간이 생겼고, 여성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여성학 강좌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지역여성운동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여성주의 저널 ‘이프’와 여성신문 경남지사 활동도 하고, 변호사와 연계해 무료법률상담도 했어요. 일본군‘위안부’ 지원 운동에도 열을 쏟고, 의정활동을 위한 의정활동가 양성 여성정치학교도 열었고요.”
 
1999년부터 경남여성회에 합류한 김경영 대표는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대학시절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초대 총여학생회장을 역임했다. 대학 안에서 여학생 휴게실 문제로 남학생들과 시시콜콜 싸우면서 학내에 여성차별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마산 수출자유지역 공단 내 일본 기업 하청업체에 취업해 10여년을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그 회사에서 여성노동조합 운동을 10년 정도 했어요. 회사에서 여성노동자들을 ‘김양’, ‘이양’이라고 불렀는데 호칭 문제로도 싸웠고요. 또 한창 머리스타일이나 외모에 신경 쓸 나이인 여직원들에게 통제수단으로 머리에 스카프를 씌우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해 싸웠지요.”
김 대표는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강제사직 당하기도 했다.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는 동료 직원들이 먼 길을 걸어와 경찰서 앞에서 항의농성도 했다. 김 대표 말대로 “동료 노동자들이 농성한다고 경찰서에서 빼주진 않았을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음날 풀려났다”고 했다. 정작 경찰서에서는 사흘만에 풀려났는데 문제는 집안 식구들이었다. 회사에서 강제사직 당할 때도 형부가 와서 김 대표의 손목을 억지로 끌어당겨 강제로 지문을 찍게 만들어 사직서를 쓰게 했고, 경찰서에서 나온 후에도 형부 집에서 한 달간 ‘감금’되어 있었다. 김 대표는 도망 나오다 잡히기도 하고, 단식까지 하며 ‘출근 투쟁’에 매진했다. 결국 김 대표의 의지를 꺽지 못한 가족들은 집에서 출퇴근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노동운동 할 때는 밤낮없이 뛰어다녔는데, 나한테 경남여성회를 소개해준 시민단체 사람들이 ‘요새 시민운동은 정시 퇴근하고 월급도 준다’고 하더라고요. 마음에 들었죠.(웃음) 하지만 내가 또 일을 찾아서 하는 스타일이라 정작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김경영 대표는 10년의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짧은 쉼의 기간 중 경남여성회에서 같이 일해 보지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는 결혼 생활에서 느끼고 있던 불합리함과 억울함에 ‘이렇게 있어서는 안되겠다’, ‘계속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내가 이만큼 온 것은 여성운동 선배들이 일군 열매로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막연한 사명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마음으로 경남여성회에 합류한 것 같아요.”
그렇게 시작한 본격적인 여성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1년간 상근하면서 아이 문제 때문에 남편과 매일 싸웠다. 호주제폐지 활동을 할 때는 집에 가면 남편과도 이 문제로 싸워야 했다. 일도 가정도 너무 힘들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1년 만에 손들고 그만뒀다. 이후 비상근으로 여성회 일에 참여하다 2004년에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현재까지 13년째 경남여성회와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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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성회 30주년 기념식> @경남여성회


“여성운동 단절 막으려면 체계적 아카이빙 작업 필요”

 
경남여성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아 2015년 말부터 3개의 팀을 꾸려 1년 동안 3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했다. 비전평가, 조직재정, 행사홍보로 구성된 팀은 월례회나 이사회 등 정례화된 기존 구조를 벗어나 운영했다. 각 팀의 팀장은 활동가 중에서 뽑고 활동가들이 주도적으로 이끌도록 했다.
“활동가들이 팀장을 맡아 팀을 운영하면서 조금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팀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운영방식과 구조가 활동가들을 성장시키는 것 같아요.”
5년 전 경남여성회 창립 ‘25년사’ 책을 발간했던 김경영 대표는 “30주년은 준비하는 과정에 의미를 두었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향후 이를 어떻게 이어갈지 논의를 마치진 않았지만 지난 1년 동안의 팀 활동의 성과를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 대표는 성폭력, 성매매 상담뿐만 아니라 여성복지, 아동복지, 평생교육 등 많은 영역에 걸쳐있는 활동에 대한 고민도 이야기했다.
“너무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하다 보니 갈수록 활동가들의 이해도도 낮아지고, 모든 사업을 집중해서 잘 할 수 있을지, 너무 소모적인 것은 아닌지 하는 고민이 있어요. 활동가 재생산이라는 과제도 있고요.”
 
개인적 비전을 묻는 질문에는 “어느새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내 나이에 맞는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답했다. 그는 얼마 전 지역여성노동운동사 구술집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이후 사람들이 여성운동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라며 체계적인 아카이빙 작업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5년 전에 경남여성회 25년 역사를 책으로 묶어냈지만 일상적이고 체계적인 아카이빙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지난 5년 동안 디지털화된 자료 정리가 더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후배들이 들어와도 정리된 틀에 따라 운용할 수 있는 아카이빙 작업을 체계적으로 해야 될 것 같아요. 내가 알고 있는 이만큼이라도 정리하지 않으면 뒤이어 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찾아서 정리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런 일을 해놔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드네요.”
 
글/사진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