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버그에서 지난 8월26일부터 6만 명이 참가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 정상회의’(WSSD)가 열렸다. 한국에서도 거의 400명이 참가하여, 이 회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다. 사전 회의에서부터 미국이 협조를 하지 않아 난관이 예상되었음에도, 10년 전의 리우회의에 비해 참석자가 두 배로 늘어난 것은 세계화와 함께 빈곤과 생태계 파괴가 더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40%가 물 부족으로 시달리고 인류의 3분의 2가 하루 2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연명하는 이 끔찍한 빈곤의 해결 없이는 생태계가 지켜질 수 없다는 문제의식과, 지속 가능한 대안사회 실현에 대한 갈망이 5만여 명의 활동가를 이 도시로 모이도록 독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호화주택이 즐비한 요하네스버그 시내에는 대중교통 수단이 전무하고, 대회본부가 마련한 버스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택시 승차는 위험하였다. 타더라도 기사가 길을 몰라 두세 시간을 헤매기가 일쑤였다. 인종 차별정책 아래에서 스웨토라는 제한 구역에 살아야 했던 흑인들은 거리감각이 없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이 힘겹고, 시애틀이나 제노아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8월31일 비정부기구 활동가 1만5천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라 자평하고 싶다. 한국 비정부기구의 활동도 독보적이었다. 가수 장사익과 화가 최병수의 문화행사는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 민간위원회, 소비자 문제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녹색연합, 환경정의 시민연대, 여성환경연대가 주도한 심포지엄과 거리운동, 사진전도 성황이었다.
요하네스버그 회의는 한국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 사용을 15%까지 늘리자는 의제 외에는, 회의는 빈곤문제에 집중되었다. 물 부족에 못지 않게 최빈국조차도 선진국이 생산하는 값싼 농산물을 이용함으로써 현지시장이 파괴되는 비참한 현실도 지적되었다. 그래서 선진국의 농업보조금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었으나, 이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미묘하였다. 고민 끝에 한국 민간위원회는 견해 표명에서 선진국의 농업보조금 삭감을 지지하였으나, 우리 농업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여야 할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정부의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위붕투에 마련된 우리 정부의 전시장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공공개발원조(ODA)나 농업보조금에 대한 정부의 견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우에서 채택된 ‘의제 21’을 한국이 잘 수행했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냉정히 관찰하자면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에너지 소비가 높은 몇몇 나라에 속하고, 열병합 발전소를 재생 에너지로 간주하는 정부의 계산법도 당혹스럽다. 적극적인 쓰레기 분리수거 운동에도 불구하고, 1992년 이후 8년 만에 쓰레기양은 1.5배로 늘었다. 한국이야말로 경제위기 극복에 자족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국민의식을 바꿔야 할 나라다.
국제사회는 우리를 더 이상 제3세계로 분류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식수준은 여전히 제3세계적이거나 혼란 그 자체였다. 개도국은 선진국에 공공개발 원조를 국민총생산의 0.7%까지 올릴 것을 요구하나, 이에 대해 정부나 비정부기구는 아직 고민도 하지 않은 상태다.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3, 14위를 다투는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부국강병론이나 정서적 민족주의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세계화는 한국에도 700만명의 비정규직과 은폐된 빈곤을 양산하고 있기에 우리 안에서도 해결해야 할 현안이 적지 않다. 그렇더라도 한국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국제사회에서 새로이 부과된 책임감을 떠맡아야 하며, 이야말로 우리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계속할 수 있는 방도임을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호화주택이 즐비한 요하네스버그 시내에는 대중교통 수단이 전무하고, 대회본부가 마련한 버스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택시 승차는 위험하였다. 타더라도 기사가 길을 몰라 두세 시간을 헤매기가 일쑤였다. 인종 차별정책 아래에서 스웨토라는 제한 구역에 살아야 했던 흑인들은 거리감각이 없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이 힘겹고, 시애틀이나 제노아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8월31일 비정부기구 활동가 1만5천명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라 자평하고 싶다. 한국 비정부기구의 활동도 독보적이었다. 가수 장사익과 화가 최병수의 문화행사는 큰 인기를 끌었고, 한국 민간위원회, 소비자 문제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녹색연합, 환경정의 시민연대, 여성환경연대가 주도한 심포지엄과 거리운동, 사진전도 성황이었다.
요하네스버그 회의는 한국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 사용을 15%까지 늘리자는 의제 외에는, 회의는 빈곤문제에 집중되었다. 물 부족에 못지 않게 최빈국조차도 선진국이 생산하는 값싼 농산물을 이용함으로써 현지시장이 파괴되는 비참한 현실도 지적되었다. 그래서 선진국의 농업보조금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었으나, 이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미묘하였다. 고민 끝에 한국 민간위원회는 견해 표명에서 선진국의 농업보조금 삭감을 지지하였으나, 우리 농업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하여야 할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정부의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위붕투에 마련된 우리 정부의 전시장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공공개발원조(ODA)나 농업보조금에 대한 정부의 견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우에서 채택된 ‘의제 21’을 한국이 잘 수행했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냉정히 관찰하자면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에너지 소비가 높은 몇몇 나라에 속하고, 열병합 발전소를 재생 에너지로 간주하는 정부의 계산법도 당혹스럽다. 적극적인 쓰레기 분리수거 운동에도 불구하고, 1992년 이후 8년 만에 쓰레기양은 1.5배로 늘었다. 한국이야말로 경제위기 극복에 자족할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국민의식을 바꿔야 할 나라다.
국제사회는 우리를 더 이상 제3세계로 분류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식수준은 여전히 제3세계적이거나 혼란 그 자체였다. 개도국은 선진국에 공공개발 원조를 국민총생산의 0.7%까지 올릴 것을 요구하나, 이에 대해 정부나 비정부기구는 아직 고민도 하지 않은 상태다. 국민총생산량이 세계 13, 14위를 다투는 우리의 의식수준은 여전히 부국강병론이나 정서적 민족주의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닌가 세계화는 한국에도 700만명의 비정규직과 은폐된 빈곤을 양산하고 있기에 우리 안에서도 해결해야 할 현안이 적지 않다. 그렇더라도 한국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국제사회에서 새로이 부과된 책임감을 떠맡아야 하며, 이야말로 우리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계속할 수 있는 방도임을 성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