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연합 '온콘' 2014 기획 시리즈 _ 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
침묵은 왜곡을 만든다
여기, ‘성매매는 인권이슈로 포함되지도 않던’ 시절부터 ‘성매매특별법’ 제정 10년을 맞은 오늘날까지 반성매매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성매매 문제해결을 위한 전국연대(이하 '전국연대') 정미례 공동대표를 두 평 남짓 소박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나는 불량 인터뷰이”
시작부터 그는 자신을 불량 인터뷰이라고 했다.
살았던 시대, 독재국가, 국가폭력에 맞설 수밖에 없었던 시대는 그로 하여금 다른 무엇을 신뢰하는데 평생의 걸림돌을 만들었다.
엄격함은 남기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도 엄격해진다. 30여년을 치열하게 운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묻자 “원동력 같은 거 없어요”라고 답하면서도 그는 놀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지독히도 목적론적으로 삶을 규정하고 살아왔기에 다른 일을 하면 마치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결국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살아남은 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이었다.
살아남은 자
그는 고3이었던 1980년을 광주에서 보냈다.
고2때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아 백기완 선생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등 당대 불법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열렬한 사학도에게 책 속에 그려진 베트남 전쟁은 학교와 사회에서 배운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기 무섭게, 광주의 잔인한 5월이 시작됐다
“그때 충격이 너무 커 공황상태였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지고 의미를 상실해갔어요. 당연히 대학갈 생각도 접었었고.”
대학 진학을 포기해가던 그를 선생님이 설득했다. “서울 사람들은 이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니 네가 서울로 올라가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결국 대학 진학을 결정한 그 순간부터 그에게 ‘살아남은 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서울로 유학을 온 그였기에 학생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민주화운동이 지상최대의 목표”였고 시대적 사명으로 “공활과 노동운동으로 이어지는 정통(?)코스”를 밟았다.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전화기 한 대
남성중심적이었던 학내 분위기에, 여성학우들은 각자 다른 써클에 적을 둔 채 동시에 여성주의 써클 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써클 선배들의 눈도장에 찍혀 엥겔스나 베벨의 저작들을 독파하게 되었고 노동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여성의 문제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20대의 끝 무렵 선배 언니의 제안으로 본격적인 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고 여성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로도 그가 함께하는 여성운동의 길목에는 ‘언니’들의 손길이 있었다.
대부분의 운동단체들이 그렇듯이 활동가들이 자기주머니 털어서 운동하던 시절, 노동운동하던 남편의 해고와 수배로 인해 생계대책이 없었던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아이양육이었다.
"그 때는 수입이 없었으니 같이 활동하던 언니들이 아이를 키워주셨어요. 각자 십시일반으로 어려운 형편을 조금씩 도와줬어요. 아들 돌도 선배들과 동료들이 음식 한 가지씩 해가지고 오셔서 축하해 주셨고요. 생계대책이 없어 힘들었지만 나눔과 공존을 배운 시기이기도 해요."
남편의 해고싸움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생계대책을 세워야 장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지역을 이전하기로 결심하고 군산으로 이사했다. 지역의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해 여성노동운동을 해보리라는 장밋빛 꿈은 지역상황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지역문화공간센터를 중심으로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 공부에 함께 온 학부모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학부모로 만난 지역여성(일명 아줌마)들과 함께 모임을 하기 위해 어린이도서연구회의 ‘동화읽는 어른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여성단체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고민은 함께 지역에서 여성모임을 하던 사람들과 이어져 지금의 군산여성의전화를 만들 수 있게 했다.
"문화원 공터 옆 마당에 컨테이너박스 세우고 그 위에 간판 걸고, 그리고 전화기 한 대가 다였어요. 전화기가 가장 중요했어요(여성의전화라고 하면 당시 지역에서 전화기 파는데냐고 하도 놀려서...)!"
이 때 모두가 웃었지만, 사실 정말 중요했다. 열악했던 지역여건에서 전화기는 여성들을 목소리로나마 만날 수 있는 창구이자 이혼문제, 가정폭력 등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단체에 접근할 수 있는 절박한 수단이었다. (계속되는 대화에서도 단체의 설립과 전화기 설치라는 쌍생은 종종 등장했다.^^)
침묵은 왜곡을 만든다
2000년 군산 대명동 화재참사, 2001년 부산 완월동 화재참사, 2002년 다시 군산 개복동 화재참사. 세 건의 화재사건은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성매매여성의 현실을, 너무나 가혹하게 드러냈다. 대명동 화재사건과 개복동 화재사건은 군산여성의전화와 전북여연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그가 반성매매운동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때 당시 그는 군산여성의전화의 사무국장이었고 이후 한국여전의 인권국장으로도 있었지만 ‘집요한’ 여성운동가들이 그를 성매매 이슈로 다시 끌어들였다. 그 역시 이 중요한 이슈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성매매는 인권이슈로 들어오지도 않았던 때였으니까, 힘들게 시작했어요. 근데 이 얘기(성매매문제)를 안 하면 자꾸 왜곡되더라고. 어떤 사건이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의미화가 되고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를 제대로 해석하고 운동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래 그냥 알아서 해라'라고 하기엔 내 자신이 용납이 안 돼서..”
그와 여성활동가들의 노력으로 성매매가 전국적인 사안으로 조명되자 그는 전국단위으로 성매매 이슈를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와 필요를 절감한다. 성매매 이슈파이팅을 통해 법(‘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제는 제대로 법이 집행되도록 촉구하고 모니터링하면서 정책요구를 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이를 위해 2004년 6월 9일, 성매매 문제해결을 위한 전국연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전국연대의 설립 준비부터 오늘까지 10여 년 동안 모든 성매매 담론과 이슈의 전면에 있었던 그에게도 쉽사리 풀리지 않는 고충이 있다.
“전체 판을 바꾸기 위해 전국연대가 만들어졌는데 10년이 된 지금도 떠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어요... 나도 탈성매매 좀 하려고 했는데.. 원래 성매매판이 힘들어요. 탈성매매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활동가들을 보면 알겠지요? 글쎄요, ‘다시‘ 공동대표를 맡았는데 임기 2년 안에 해결이 안 될 거 같은데^^. 어떻게 해서든지 누군가를 끌어다가 일하게 하고 나도 탈성매매해야지요.”
상담영역이 확장, 제도화 되는 시점에, 운동단체의 사무국은 여성의제에 대한 운동성을 지켜가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비단 반성매매운동만의 고민이 아니다. 여성주의 상담이 복지 상담화 되면서 운동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기다. 그가 생각하는 반성매매 운동의 비젼을 들어보자.
"성매매이슈가 다들 어렵고 힘들다고 하잖아요. 여성문제나 인권문제는 대중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슈나 담론, 실천현장이 맞물려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부장제를 바꾸는 여성운동 안에서도 성매매이슈, 성매매여성에 대한 관점, 문제해결이 함께 공유돼서 주요한 의제로 같이 가야 가능해요. 올해가 법(‘성매매특별법’) 제정 10년인데, 숫자를 넘어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라고 봐요. 무조건 소수의 몇 명, 몇 개의 단체만 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 함께 같이 갈 것인가, 또 반성매매운동의 중요한 문제인 성매매여성의 비범죄화라는 어려운 말을 어떻게 잘 풀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영역도 넓히고 할 것인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 그 안의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
'성매매특별법' 제정과 전국연대의 설립까지,
성매매이슈의 역사의 산증인이다.
맞지 않는 옷
사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노동운동에 대한 미련이 있다. 이렇게 여성운동에 투철하고 치열한 그가, 성매매이슈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수십 년 여성운동을 하면서도 그는 여성운동은 계급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걸렸다. 타협적인 운동, 제도화 운동, 부르주아 운동이라는 생각이 내적갈등을 일으켰다.
"사실 여성적인 가치가 나에게 딱 맞는 옷은 아니에요. 페미니스트는 관점과 가치의 문제니까. 페미니즘의 가치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하고 지금도 질문해요. 다만 여성적인 가치가 중요하고, 필요하고, 동의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
인천여노에서 활동하기 전까지 20대의 대부분을 노동현장에서 노동운동으로 치열하게 살아내고, 끊임없이 내가 여성운동을 하는 것이 맞는가라는 내적갈등을 겪는 그가 이렇게 오랜 시간 여성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은 비단 가치에 대한 동의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깊은 ‘신뢰’가 있는 것이다.
“(운동하는) 과정에서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힘을 받고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보려고 노력해요.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제도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 대해서 실천적인 분야는 그나마 여성운동이라고 봐요. 그래서 여성운동에 있는 거고. 최소한 우리 안에는 왜곡되지 않고 힘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같이 해보자는 부분에 진정성이 있고 이것이 여성운동 활동가들의 내공이 아닌가 해요. 내가 이렇게 말해도 왜곡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믿음에 대한 경계로 사진 한 장 기록 하나 쉬이 허락지 않는 그가 인터뷰에 응해준 것도 결국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역사성과 진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더불어 여성운동사의 산증인인 그는 후배들을 이끌고 함께 가야 하는 ‘언니’라는 또 하나의 사명감으로, 아픈 기억까지 꺼내주었을 것이다.

그는 경험을 성찰해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경험들은 역사 그 자체였다. 이 역사의 경험을 토대로 그는 계속해서 역사를 구성해나가고 있다. 현장과 함께 하며 평생 운동가로 살겠다는 그가 2개월 차 신입 활동가인 나는 먹먹하도록 감사했다. 그리고 그의 거친 인생이 무색하도록 더없이 해맑은 그의 함박웃음에 다시 또, 감사하고 감사하다.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는
2004년 6월 9일 발족한 반성매매여성인권운동 연대체입니다.
전국 12개 지역 회원단체가 있으며 상담소, 쉽터, 자활, 당사자네트워크 모임, 활동가아카데미, 정책세미나와 토론회, 매년 전국적으로 민들례 순례단 활동 진행, 여성폭력추방운동 및 연대활동을 통한 성평등한 사회 실현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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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성연합의 '온콘'은 전국의 여성운동가 인터뷰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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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 정미례 '성매매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공동대표
인터뷰어 : 이루용, 김손경미
기사 작성 : 김손경미
사진출처 : (순서대로)
박준희, "성매매 영업 무한 변형... 당국은 인력 타령만", 문화일보, 201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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