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일 서울 청계천 소라광장에서 우리의 딸들인 교복 입은 십대소녀들이 그들의 급식 식탁에 오를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와 그들의 삶을 옥죄는 교육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며 촛불을 들었다. 이 촛불은 유모차를 앞세운 주부들, 젊은 직장 여성들, 시민들, 운동가들, 그리고 정치인들을 시청광장으로 불러 모으는 가 하면 급기야는 바다 건너 미국 언론을 움직이는 (한겨레 08-06-16) 힘을 발휘하였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다.
어린 딸들과 평범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낸 평화적인 촛불대행진에서는 여성들의 주권의식이 한껏 발현되었다.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피보호자, 관리의 대상, 보살핌의 대상이 아니며 다른 누군가가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당당한 주체적 존재로서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의 행위자임을 입증하였다. 성숙한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갖추어야 할 '자조, 독립, 자율' 정신을 보여준 것이다.
촛불대행진을 여성들이 앞상섰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성장논리에 집착하고 있는 행정부와 민생은 뒷전에 두고 권력 싸움에 매몰되어 있는 정치권에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생활행정과 정치를 하지 않고서는 존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생활정치는 유권자들이 지난 제 17대 국회에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두 자릿수의 여성의원과 과반수이상의 초선의원들을 진출시키면서 염원한 바 있는 정치권 핵심과제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개혁이란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다수의 참여로 가능하다는 것이 이번 촛불의 힘이 보여준 것이다.
한국여성재단의 금년도 여성희망캠페인을 여성신문과 공동캠페인으로 전개하면서 내건 명제가 '이제 기부도 롱테일 시대'였다. 롱테일(Long Tail)이란 상위 20%가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는 경제학상의 '파레토법칙'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평범한 80%가 주도하는 시장을 의미한다. 십시일반의 기부의 힘과 민주주의 실현을 평범한 80%의 시민의 힘으로 이루어 내듯이 여성운동에도 '롱테일'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번 촛불광장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이는 묻고 있다. '6월의 밤을 뜨겁게 달군 촛불이 미국 쇠고기가 불어온 생활의 정치를 넘어 사회문화적 변혁의 지평을 열 수는 없을까'라고. 그래야 한다. 여성들이 앞장서서 추구하고 있는 우리 딸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평등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 나눔과 돌봄의 사회, 자연과 조화되는 사회, 빈곤이 여성에게 치우치지 않는 사회를 위해 사회문화적인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지난 6월 10일 촛불바다에서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한다고만 여겨왔던 나이어린 '촛불세대', 그 중에서도 우리의 딸들이 이 나라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어린 딸들이 밝힌 촛불로 이루어진 거대한 민주주의 배움터에서 얻은 교훈들을 중단 없이 발전시키기 위해 재단도 새로운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박영숙_한국여성재단 이사장
* 본 기고문(한국여성재단 <딸들에게 희망을> 2008년 여름호 여는 글)은
필자의 동의하에 전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