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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친절한 금자씨> 시사회 후에 기자회견을 위해 나온 배우 이영애씨와 박찬욱 감독  ⓒ 2005 오마이뉴스 안홍기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29일 개봉)는 아직 개봉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과, 이영애라는 스타 배우의 존재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특이한 캐릭터- '친절한 금자씨'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소위 천사와 마녀의 경계선에 있는 여성의 복수극이라는 설정이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영화에는 여성 캐릭터가 내러티브의 중심이 되는 영화들이 잇달아 선을 보이고 있다. 이런 트렌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런 여성 캐릭터들을 묘사하는 방식이 종래 한국영화가 가지고 있던 관습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종래 금기시되던 여성의 성적 욕망이라거나, 금기를 구분 짓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투쟁과 저항, 여성 내부의 은밀한 소통과 관계 등, 현대 여성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캐릭터들의 중심에 세운 영화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하고 있다.

제도와 권위의 이데올로기가 황폐화시키는 여인들의 순정

상반기 국내 상업영화들이 주로 남성 중심적인 시선의 영화, <달콤한 인생> <주먹이 운다> <혈의 누> <남극일기> 등에 이르기까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강한 척하지만 결국 실패하거나 좌절하고 마는' 루저형 남성 캐릭터들을 내세운 영화가 많았다면, 6월 이후의 한국 영화에서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류로 내세운 영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영화에서 즐겨 소비되는 여상상이라면, 종래 남성 중심적인 판타지의 시선에서 해석되거나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엽기적인 그녀>로 대변되는 청춘영화에서 등장하는 겉보기에 급진적인 신세대 여성상도 결국에는 눈물과 신파의 전통적 판타지로 귀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남성들의 사랑이나 선택이 없다면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수동적인 캐릭터 내지는 아예 이야기의 중심에 배제되어 남성 주인공의 주변부에만 머무르는 보조적인 캐릭터인 경우가 다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독립적이고 자의식 같은 여성상, 단순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커리어우먼이나 악녀의 전형성을 떠나 자신의 정체성과 욕구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하고, 사회적 편견이나 부당한 차별에 대하여 고뇌하는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있다.

<연애의 목적>의 최홍(강혜정), <녹색의자>의 문희(서정), <분홍신>의 선재(김혜수), <여고괴담4-목소리>의 영언(김옥빈)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최근 달라진 한국 영화 속의 여성상을 반영하는 캐릭터들.

최홍과 문희는 영화 속에서 자신들의 방식대로 '사랑'을 하지만, 남성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와 제도의 편견 속에서 고립되는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나름대로 순수했던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왜곡되고 상처받는다.

유림(박해일)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소유욕과 집착이 사랑으로 왜곡되는 동안, 최홍은 유부남을 괴롭히는 스토커로 몰려서 모교를 떠나야 했다. 문희는 사랑하는 대상의 물리적 나이가 법정 미성년인 19세 소년이었다는 죄(원조교제)로 감옥에까지 가게 된다. 그들의 사랑을 재단하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사회와 여론이라는 제3의 시선이다. 궁지에 몰린 최홍은 자기 방어적으로 돌변하여 '생존'을 위해 유림을 버리게 되고, 문희는 세상의 편견을 피해 자꾸만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이들 영화는 로맨스를 소재로 한 영화임에도 솔직히 보는 이를 무척 불편하게 한다. 그것은 영화가 이야기하는 로맨스의 공식이 일반적인 사회의 통념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에서 사회 통념과의 연관성은 아예 배제되거나 사랑의 초월성을 과시하는 식의 낭만적 결론이 대다수다.

한국 영화는 아니었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마더> 역시 초월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초월적인 사랑의 주체가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성'신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기의 영역이다. 끝없는 애정과 헌신의 판타지로 채워도 모자랄 어머니 속에, 감춰진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확인하게 만드는 과정은 괴롭다. 그리고 어머니 스스로도 딸의 연인과의 금지된 사랑이 끝내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선천적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 영화 속의 최홍이나 문희 역시 이런 사회적 통념의 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적 여성들이다. 그녀들의 잘못이라 한다면 사회의 일반적인 성 모럴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지른(혹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순수한 감정에 충실한 죄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부정한 여자라는 상처뿐이다. 종래 낭만적인 판타지의 소재로만 소비되던 '연애'와 '사랑'이라는 영역 위에 사회적 담론의 이데올로기가 개입하게 될 때 인간, 특히 여성의 입장을 얼마나 일방적으로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시선은 차갑고 예리하다.

공포 영화 속에 드러나는 여성의 욕망

올 여름시장에서 한국 공포영화의 화두는 '여성의 욕망과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각 영화에서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없이 언제나 경계선에 불안정하게 걸쳐 있는 여성 캐릭터들 속에서는 전형적인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분홍신>은 어떠했는가? 우연히 줍게 된 분홍신 한 켤레로 인하여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파국 속에 휩쓸리게 되는 여인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전통적인 모성의 붕괴가 확인된다.

<마더>에서는 남자를 놓고 딸과 연적 관계를 형성했던 어머니가, 한국영화 <분홍신>에서는 구두 한 켤레를 놓고 모녀가 벌이는 집착과 탐욕의 사투로 변한다. 아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듯한 절절한 모성은 <분홍신>에 없다.

선재가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우선 강조되는 것은 '어머니'라는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 건조한 대명사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인정받고 싶은 개인적 욕구가 우선한다. 욕망의 상징인 분홍신을 놓고 여인들이 벌이는 암투에 가까운 난동 속에 어머니와 딸도, 어른과 아이도, 선배와 후배의 구분도 없다. 세대와 연령을 막론하고 그들에게 있어서 '분홍신'은 욕망과 집착의 상징이며 분홍신을 차지하고자 달려드는 주변 인물들은 그녀들에게 '라이벌'이 될 뿐이다.

<여고괴담4-목소리>의 영언은 겉보기에 여성스럽고 성실한, 그저 평범한 여고생이다. 그러나 그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고, 그 죽음의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은폐된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추악한 과거다.

과거가 구체화될수록 영언의 자아는 분열되기 시작한다. 잊히지 않으려는 소녀와 잊으려는 소녀 사이의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영언은 점차 자신 속에 내재된 불온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계획적인 의도로 타인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느라 타인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소녀들의 심리는, 단순하고 순수하기에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는 잔인한 이기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억압된 여성의 자의식이다. 그 속에는 남성들의 판타지 속에만 존재하는 청순가련한 소녀나 여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무대 속에서 올바른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선악 판단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충실하기 위해 투쟁하는 현실적인 여성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주도해간다.

공포영화는 전통적으로 여성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장르였다. 그러나 슬래셔 무비같은 전통적인 할리우드 장르 영화와 달리, 한국 공포영화는 여성의 육체와 사디즘을 소비하는 관음증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분홍신'이나 '목소리'라는 소재는 여성의 억압된 욕망을 상징하는 심리적 기재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사다코의 후예들보다 화면을 더 팽팽한 긴장감으로 물들이는 것은, 바로 여성들간의 미묘한 심리 드라마이다.

오히려 장르의 전통적인 컨벤션을 따르지 않더라도, 여성의 복잡한 내면 변화와 잠재된 인간 욕구를 탐구하는 시선은 순간적인 충격효과보다 차갑고 슬픈 여운을 남긴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가발>이나 <첼로>와 같은 영화들도 이처럼 공포라는 장르 위로 변주된 여성 드라마의 형식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최근에 기존 한국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신선한 여성 캐릭터들의 출현은 한국 영화의 소재와 표현 범위가 한층 넓어진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들의 흉내를 내는 마초적 여성 캐릭터나, 공식에 충실한 관습화된 여성 캐릭터가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현실적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이로 인하여 앞으로 영화 속에서보다 시대의 정서와 트렌드를 대변할 수 있는 진보적 여성 캐릭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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