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첫경험

여성연합 2002.06.18 조회 수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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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은 다들 그렇고 그런 비슷한 살림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처럼 도시락도 비슷비슷했었다.
콩, 보리, 수수, 조 등이 섞인 밥에
김치, 계란말이.. 가끔씩 등장하는 장조림 등..
장조림이 도시락에 들어간 날의 기분은 부잣집 외동딸 부럽지 않았었다.

그런 반찬들 속에 유난히 튀는 반찬을 싸 가지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6학년 때 내 짝.. 엄마가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부잣집 아이였다.
그 당시는 그 병이 뭔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잘사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라고 믿었다.
당뇨병에 걸린 엄마의 식단위주로 싸온다는 그 애의 반찬은
항상 동그랑땡(순살코기로만 된), 소시지, 샐러드, 불고기 등..
남들은 1년에 한 번 구경하기도 힘든 반찬들 이었기에...


그 날도 점심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펼쳐놓은 그 애의 영양가 가득한
반찬들을 훔쳐보면서..
부러움 가득한 마음으로 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김치에.. 계란말이(?)... 아님 아침에 먹던 콩나물 무침??
아니었다.
까만 무들이 자로 잰 듯이 썰려서 가지런히 반찬 그릇 안에 누워있었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까만 색과 흰색의 조화..
순간 도시락 뚜껑을 닫을까하다가 성장의 목마름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먹기로 했다.
한 숟가락.. 두 숟가락... 누가 볼까봐 그 것들을 가리고 먹고 있는데...
"야!! 이거 무슨 냄새야??!!" 앞의 앉은 남자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며
내 얼굴과 반찬을 번갈아 쳐다봤다.
"네 반찬!! 그 냄새구나. 지독하다!!" 더 이상의 말없이 그 아이는
그 날 따라 매일 싸 가지고 다니던 달랑 김치하나에 달걀말이가 추가된
반찬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개나리, 진달래가 울긋불긋 핀 내 짝의 도시락..
소나기 퍼붓기 전 캄캄해지는 순간 같은 내 도시락이
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비교도 되지 못하는 차이를 느끼며, 도시락 뚜껑을 지금 덮어 버리면
내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밥을 계속 먹기로 했다.

그런데 그 녀석의 뒤통수를 한 번 쏘아보고 먹기 시작한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거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이 되어 입안의 밥알만을 겨우 삼키게 만들었다.
그 날 나는 그 아이와 내 짝이 밥을 맛있게 다 먹을 때까지..
아니 그 날이 다 지도록 도시락을 먹지 못했다.

새로 사준 원피스를 입고 공주 같은 기분으로 학교에 간 막 가슴멍울이
서기 시작한 여자아이는 잿빛 가슴을 안고 몇 년을 더 입어도 맞지 않을 것
같은 큰 원피스 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함을 안고 집으로 갔다.

그 날 이후로.. 등교 전 반찬 사전 검사제가 실시되었고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그 까만 된장 짠지를 내 반찬에 끼워주지 않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짠지라는 놈은 내 생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장마가 지는 계절에 찬물에 밥 말아서 된장짠지 얹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고..
없던 입맛이 돌아온다고..
티비나 라디오에서 요리 전문가들이 떠들고...
동네 인심 좋은 아줌마들이 그 것을 건네도 난 아주 냉정하게 그 것들을
쓰레기통에 비닐에 몇 번씩 꼭꼭 싸서 버려 버린다.

당신들은 몰라요..
그 건 내게 하나의 음식이 아니라 자존심의 상처라는 것을...
그런 반찬을 싸 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집 형편의 초라한
단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막 여자의 모습을 닮아 가는 한 어린아이가 처음 느낀
가난에 대한 수치였다는 것을...

이 다음에 내 아이들이 커서 도시락을 싸게 되면 난 절대로 된장짠지는
반찬으로 넣어주지 않을 것이다.
소금에 겨우내 절은 무짠지면 몰라도 말이다.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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