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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묻은 손으로 셔터를 꽉 잡은 채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 여성농민의 외마디 절규에 주변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하지만 셔터에 매달린 3명의 여성농민이 탈진해 병원으로 실려간 것을 마지막으로 8시간 동안 계속된 농협중앙회 정문 셔터 시위는 막을 내렸다.
"쌀 생산비를 보장해 주세요"
15일 낮 서울 서대문로 농협중앙회 본사에 들어가려던 농협 고객들은 평일인데도 굳게 닫힌 셔터문에 당황해 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쌀 생산비를 보장해달라'는 문구가 적힌 누런 쌀 포대를 뒤집어쓴 채 셔터문 위에 꼼짝없이 매달려 있는 세 여성농민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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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농성 4일째인 15일 아침 8시30분경. 나흘동안 굳게 닫힌 셔터문안에 가로막혀 건물 로비와 정문 앞으로 나눠 농성을 벌이던 여성농민들과 농협 용역경비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나주시 봉황면지회 박복실(50) 회장이 쓰러져 가까운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갔다. 연로한 70대 회장들은 이미 탈진해 병원으로 옮긴 상태였다.
이에 흥분한 여성농민들은 정문 양쪽에서 셔터문을 흔들며 강하게 항의했고 급기야 건물안에 남아있던 이연옥(35) 전남연합 사무국장, 주향득(40) 회장, 나애경(34) 교육부장 등 세 명은 오전 9시경 정문 셔터를 타고 올라가 농협중앙회장 면담을 요청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주향득 회장은 관절이 좋지 않아 동료들이 만류했지만 자신의 몸과 셔터문을 끈으로 꽁꽁 묶은 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셔터 농성 5시간을 넘긴 오후 2시경. 뒤늦게 전여농 시위 소식을 들은 전국연합, 범민련 등 재야단체 소속 원로들이 농성 현장을 찾아 시위에 동참했고 오후 3시경 마침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한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던 100여명의 한총련 소속 학생들까지 가세했다.
"농협회장 나오기 전엔 못 내려가"
오후 4시경. 짙은 구름 탓에 농성장 주변은 벌써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나절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셔터문에만 매달려있는 여성농민들의 건강을 염려한 재야단체 원로들은 이들을 설득해 끌어내리기로 결정했다.
"이제 그만 내려오세요. 여기서 쓰러지면 아무 소용없어요. 천막도 치고 장기전에 들어가야죠."
하지만 원로들의 간곡한 설득에도 이연옥 사무국장을 비롯한 세 여성농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우린 못 내려가요. 지금까지 농협 회장은 아무 반응도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내려가겠어요."
이번엔 대학생들까지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니, 이제는 내려오세요. 우리가 함께 투쟁하겠습니다."
농성 8시간째인 오후 5시경. 더 이상 말로는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원로들은 강제로라도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원로들이 셔터문을 타고 올라가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지만 셔터를 부여잡은 그녀들의 손은 더욱 굳세질 뿐이었다.
결국 몸을 묶은 끈을 풀고 셔터문에서 그녀들의 손과 발을 차례차례 억지로 떼어냈다. 이 과정에서 한 여성농민은 바닥에 깔아놓은 스티로폼 더미 위로 떨어져 보는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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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미 300만석 대북 조기 지원해야"
"여성농민들이 오죽하면 아이들과 바쁜 일손까지 팽개치고 여기까지 올라왔겠습니까? 차라리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속은 편합니다."
누런 가을 들녘에서 한창 추수의 기쁨에 젖어야할 여성농민들을 차가운 서울 시멘트 바닥으로 이끈 것은 생산비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쌀 수매가였다.
정부는 올해 농협을 통해 400만석을 추가 수매하기로 결정하면서 추곡수매가 대신 시가매입제도를 적용하기로 했다. 시가매입제도란 농협이 정부로부터 3% 저리융자를 받아 벼를 시중가격으로 매입해 이를 다시 시중가격으로 방출하는 제도.
하지만 전여농측은 시중가격제도가 정착될 경우 농협이 자신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쌀 수매 가격을 계속 낮출 수밖에 없어 현재 쌀 가격이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쌀 수매가를 추곡수매가인 17만원대에 맞춰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농민들은 2004년 WTO 쌀 재협상을 앞두고 있는 정부가 쌀 시장개방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미리 쌀 가격을 떨어뜨리려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현재 정부가 내세우는 쌀 생산과잉 역시 단기적인 현상이며 그 주원인도 수입쌀 증가에 있다며 쌀수입개방정책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전여농에서는 재고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북한에 300만석 이상을 조기 지원하고 정부 보유미 공매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용옥 전여농 정책부장은 "농민들이 정부의 쌀 수입개방 정책과 시가매입제도 철회, 쌀 생산비 보장을 위한 농성을 계속 벌여왔지만 농협과 정부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고 있다"면서 농림부와 농협의 책임있는 답변을 요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