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아인쉬타인의 첫번째 부인

by 여성연합 posted Apr 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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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의 창시자 아인쉬타인, 그는 결혼을 두 번 했다. 두번째 부인 엘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첫번째 부인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거의 없다. 그의 이름은 밀레바 마리치. 상대성 이론이 무르익는 동안 함께 삶을 나누었던 밀레바 마리치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과학도로서 아인쉬타인의 지적 반려자였다.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성과라고 일컬어지는 상대성 이론이 탄생하기까지 그가 한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아인쉬타인이 누린 명성과 영예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공동연구로 태어난 상대성 이론

밀레바와 아인쉬타인이 처음 만난 것은 1896년 스위스 취리히의 국립공과대학에서였다. 밀레바는 21살, 아인쉬타인은 네 살 아래인 17살이었다. 밀레바는 그 대학이 문 연 이래 다섯번째 여학생이었으며, 그해 입학생 중에는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그의 꿈은 물리학자였다.

옛 유고슬라비아 북부의 보이보디나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 밀레바는 선천성 고관절 이상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수학, 물리학, 음악,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여자에게는 고등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지만 밀레바의 아버지는 딸을 취리히로 유학 보냈다. 그때 유럽에서 여자가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곳은 취리히뿐이었다.

아인쉬타인과 밀레바는 서로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아인쉬타인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하는 이유는 밀레바가 신체장애자인데다가 세르비아인이기 때문이었다. 게르만족인 독일인은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을 멸시하고 있었다. 아인쉬타인 집안은 유태인이었지만, 세르비아인을 멸시하기로는 독일인과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리저렐,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그러나 이후 리저렐은 아인쉬타인과 밀레바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인쉬타인은 공개적으로 딸 이야기를 한 적이 한번도 없다. 아마 리저렐은 태어나자마자 입양된 것 같다.

1년 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오늘날 아인쉬타인 소박물관이 되어 있는 2층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아인쉬타인은 세 편의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상대성 이론이다.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세 편의 논문은 밀레바와의 공동연구였다. 이는 아인쉬타인 자신의 말로도 입증이 된다.

"우리가 함께 운동의 상대성에 관한 연구를 성공적으로 끝맺는다면 나는 행복과 자부심에 넘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공동작업을 해보면 당신이 내게 얼마나 귀중한 사람인지 절로 알게 됩니다."
아인쉬타인이 밀레바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아인쉬타인이 발표한 세 편의 논문에 밀레바는 과연 얼마만큼 기여했을까? 오늘날 상대성 이론이 누리고 있는 갈채와 영광 가운데 밀레바에게 돌아갈 부분은 어느 정도일까?

상대성 이론의 전환점이 된 기본개념을 창안한 사람은 밀레바이며 아인쉬타인은 그에 종합적인 형식을 부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논문의 원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밀레바의 역할과 비중을 정확히 가려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밀레바의 역할을 최소화시킨다 해도 그가 아인쉬타인의 대화와 토론 상대자요 검토와 비판 담당자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밀레바는 깊은 사랑과 신뢰로 아인쉬타인을 감싸고 격려함으로써, 아인쉬타인이 기성 학계의 곱잖은 시선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갈 수 있는 소우주를 만들어주었다.

밀레바에게 준 노벨상 상금

첫아들 한스에 이어, 둘째아들 에두아르트가 태어날 무렵부터 두 사람 사이는 차츰 변질되어갔다. 에두아르트는 매우 섬세하고 병약한 아이여서 밀레바는 그를 돌보느라 전처럼 연구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아인쉬타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다. 밀레바는 유명인사의 아내로서 파티와 공식석상에 어울리는 화려한 안주인 노릇을 해야 했지만, 멸시당하는 세르비아인 출신에다 다리를 저는 밀레바에게 그 역할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 밀레바는 차츰 우울해져갔다. 그런 가운데 아인쉬타인은 사촌 엘사와 가까워졌다. 그리고 1919년 아인쉬타인의 요청으로 두 사람은 이혼에 이르고, 4개월 뒤 아인쉬타인은 엘사와 재혼을 했다.

밀레바는 피아노 렛슨과 수학 지도로 생계를 꾸리며 아들 둘을 길렀다. 그러던 중, 신혼시절 밀레바와 공동연구끝에 발표했던 세 편의 논문 가운데 하나인 광양자 이론으로 아인쉬타인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아인쉬타인은 상금을 모두 밀레바에게 주었다. 미안함의 표시였을까? 아무튼 밀레바는 그 돈으로 생활고에서 벗어났다.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 병의 근원은 아버지였다. 아인쉬타인은 과학자로서는 훌륭했지만 아버지로서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큰아들 한스는 아버지를 몹시 싫어했고, 일찌감치 독립하여 자신의 길을 걸었지만, 섬세하고 예민했던 에두아르트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떨구지 못했다. 아인쉬타인은 엘사와 함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에두아르트를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한 것은 밀레바였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에두아르트가 또 발작을 일으켰고, 밀레바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났을 때는 왼편을 못쓰는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밀레바는 병상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73살의 초라한 노파가 되어서. 그가 죽은 뒤 아인쉬타인은 7년을 더 살았고,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원에서 17년을 더 살았다.

깨어지는 신화

밀레바, 아인쉬타인, 에두아르트가 모두 죽은 뒤에도 아인쉬타인의 신화는 계속되었다. 음울한 가족사가 밝혀지는 것을 꺼려한 아인쉬타인의 사도들은 큰아들 한스가 생전에 부모님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비롯해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모아 출판하려 하자 소송을 걸어 중단시켰다. 아인쉬타인이 죽을 때 자신의 모든 출판물에 대한 저작권을 비서 뒤카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계속되던 아인쉬타인의 신화는 1982년 뒤카스가 죽고 아인쉬타인의 저작권이 헤브루 대학으로 넘어가면서 비로소 깨지기 시작했다. 밀레바가 아인쉬타인의 지적 반려자로서 저작권에 제 몫을 요구할 만하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었고, 리저렐이라는 사라진 딸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아인쉬타인은 위대한 과학자다. 그가 인류문화에 기여한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누린 찬란한 영광의 그늘 아래 비틀린 삶을 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함께 얘기되어야 한다. 그런다고 아인쉬타인의 업적이 빛 바래는 건 아니다.

밀레바 마리치는 마리 퀴리와 동시대를 살았다. 마리 퀴리 못잖은 역량을 지녔으면서도 꽃피지 못한 밀레바의 삶은 퍽이나 안타깝다. 사회적 성취가 곧 성공한 삶은 아니다. 그러나 밀레바는 학문으로도, 한 남자의 아내로도, 어머니로도 철저히 묻혀지지 않았나.

죽음의 병상에서 밀레바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떠난 사랑에 대한 분노, 병든 자식에 대한 애절한 아픔과 책임감, 그 모두보다 더한 외로움... 무거운 짐을 지고 산 밀레바의 마지막 느낌은 평온한 해방감, 그것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