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나선 코르테스가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발디딘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인 1519년, 그의 나이 34살 때였다. 원주민 인디오 부족들이 사는 마을들을 차례로 손에 넣으며 아즈텍 제국의 심장부로 다가가던 코르테스에게 하루는 특별한 선물이 들어왔다. 인디오들이 평화를 제의하면서 바친 여인들이었다. 스무 명의 인디오 여인들은 난생 처음 보는 하얀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험상궂은 백인 남자들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문득 한 여인이 코르테스 눈에 띄었다. 단정한 생김에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여인이었다. 이름은 말린친.
'유토피아' 아메리카
아즈텍 제국은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메히코 테노크티틀란. 지금의 멕시코 시티다. 메히코는 '달의 배꼽'이란 뜻으로, 멕시코는 메히코에서 나온 이름이다. 테노크티틀란은 물의 도시였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처럼 사방팔방으로 뚫린 운하로 카누가 떠다니고, 운하 양옆으로 보도를 깔아 사람들이 걸어다녔으며, 운하와 운하, 운하와 보도가 만나는 곳마다 다리를 놓았다. 위급상황이 생기면 들어올릴 수 있게 만든 다리였다. 테노크티틀란은 도시 자체가 호수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때 유럽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앞다퉈 동방진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스페인 왕의 지원 아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고, 포르투갈 왕의 지원 아래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어 유럽에 새로운 빛을 던지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질문했다. 인간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만나는 이상향은 존재하는가?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유토피아란 '유 토포스(U-Topos)'에서 비롯된 말이다. 말뜻은 '어디에도 없다(Nowhere)'.
그러나 정복자들은 이상향은 존재하며 아메리카가 바로 그곳이라고 대답했다.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곳이야말로 지상낙원이라고 했고, 피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 또한 아메리카는 왕도 정부도 사유재산도 없는 완벽한 유토피아라고 했다. 유토피아를 그리는 모험가들, 신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 '엘 도라도'를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는 정복자들이 미지의 세계로 줄이어 떠났다. 코르테스도 그중 하나였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멋진 신세계 아메리카에 대한 꿈에 부풀어 19살 때 서인도 제도로 건너갔고, 오랫동안 기회를 노린 끝에 아즈텍 정복에 도전한 것이다.
정복자의 여자
말린친은 총명했다. 그녀는 지역마다 다른 원주민 언어를 두루 알고 있었다. 스페인 어도 금방 배웠다. 코르테스는 말린친을 통역겸 애인으로 삼았다. 코르테스는 그녀를 '미 렝구아' 즉 '나의 혀'라고 부르면서 매우 아꼈다. 말린친은 카톨릭 세례를 받고 마리나라는 스페인식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원주민 인디오들은 그녀를 말린친도 마리나도 아닌 말린체라고 불렀다. 정복자의 여자, 배신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통역뿐 아니라 상담자, 조언자로 활약했다. 코르테스에게 인디오의 사고방식, 관습, 종교, 전통에 대해 설명해주고 아즈텍 제국의 구석구석을 안내해준 것은 그녀였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웅장한 도시 테노크티틀란에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목테수마가 살고 있으며, 황제의 군대가 대오를 이루면 바다에 물결이 일듯 온 땅이 뒤덮인다고 말린체는 말했다. 30개나 되는 속국들이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긴 하지만, 속으로는 아즈텍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더 강한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아즈텍 제국에 등돌릴 게 틀림없다고 귀띔 해준 것도 그녀였다. 말린체가 건네준 정보와 지식은 그 어느 무기보다 미덥고 강력했다. 코르테스는 그 정보와 지식을 토대로 아즈텍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인디오들끼리 내분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유력한 인디오 부족들이 코르테스 편에 속속 가담해왔다. 그렇게 되기까지 말린체가 부족들 사이를 오가며 능란한 언변으로 수완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
1521년 결국 아즈텍 제국은 스페인 군대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1100만의 인구와, 온 땅을 뒤덮을 만큼 많은 군대를 가졌던 아즈텍 제국이 불과 500명 남짓한 코르테스 군에게 패한 것이다. 만약 말린체가 돕지 않았다면 코르테스의 승리는 훨씬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말린체가 아니었다면 아즈텍은 침입자의 말발굽 아래 그토록 쉽게 짓밟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말린체는 왜 코르테스에게 협력했을까? 그녀가 동족인 인디오를 외면하고 낯선 정복자의 여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해답은 그녀의 과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잘 모른다. 귀족의 딸이었다는 설도 있고, 왕의 딸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코르테스에게 해준 조언이 상당한 안목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즈텍 제국에 짓밟힌 어느 작은 부족 출신일까?
말린체는 어려서부터 노예로 팔려다녔다. 물 긷기, 옥수수 빻기, 옷감짜기 같은 노동을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녀가 여러 원주민 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곳을 떠돈 때문일 것이다. 코르테스와 만났을 때, 말린체는 이미 삶의 어두움과 인간의 악덕을 실컷 맛본 여인이었다. 그녀가 동족에게서 받은 것은 멸시와 학대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참한 기억과 관련된 모든 것, 동족과 고향까지 말린체는 깡그리 부정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메스티조의 어머니
말린체는 코르테스의 아들을 낳았다. 마르틴이라는 이름의 이 아들은 인디오 여성과 스페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최초의 혼혈 아메리카 인, 그러니까 첫번째 메스티조다. 메스티조는 정복자의 피를 받은 자식이다. 오늘날 멕시코인의 60% 이상이 혼혈이며, 그중 가장 많은 것이 메스티조다. 흑인과 인디오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물라토,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은 크리오요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말린체는 오늘날 멕시코인의 어머니인 셈이다.
20세기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중에 오로스코라는 사람이 있다. 초대형 벽화로 이름난 민족화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코르테스와 말린체>라는 작품이 눈을 끈다. 말린체의 손을 잡은 코르테스가 바닥에 엎드러져 있는 인디오를 발로 짓밟고 있는 그림이다. 말린체와 코르테스 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의기양양한 코르테스 옆에서 말린체는 눈을 감은 채 짓밟히는 동족을 외면하고 있다. 정복자와 정복당하는 자의 극적인 만남이다.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나름의 독특하고도 수준높은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마야, 잉카, 아즈텍의 유적들이 그 사실을 웅변한다. 아메리카 인디오 문명은 생명력 넘치는 젊은 문명이었으나 유럽의 침략을 받아 굴절되고 말았다. 지금의 라틴 아메리카는 그 침략과 굴절이 낳은 결과다.
침략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배신과 변절의 역사가 있다. 우리에게도 친일파라는 부끄러운 유산이 있지 않은가. 지금도 멕시코에서는 말린체 하면 배신자라는 뜻으로 통한다. 말린체, 그녀에게 말린친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이름이다.
'유토피아' 아메리카
아즈텍 제국은 중앙 아메리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메히코 테노크티틀란. 지금의 멕시코 시티다. 메히코는 '달의 배꼽'이란 뜻으로, 멕시코는 메히코에서 나온 이름이다. 테노크티틀란은 물의 도시였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처럼 사방팔방으로 뚫린 운하로 카누가 떠다니고, 운하 양옆으로 보도를 깔아 사람들이 걸어다녔으며, 운하와 운하, 운하와 보도가 만나는 곳마다 다리를 놓았다. 위급상황이 생기면 들어올릴 수 있게 만든 다리였다. 테노크티틀란은 도시 자체가 호수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때 유럽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앞다퉈 동방진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스페인 왕의 지원 아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고, 포르투갈 왕의 지원 아래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어 유럽에 새로운 빛을 던지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질문했다. 인간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만나는 이상향은 존재하는가?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유토피아란 '유 토포스(U-Topos)'에서 비롯된 말이다. 말뜻은 '어디에도 없다(Nowhere)'.
그러나 정복자들은 이상향은 존재하며 아메리카가 바로 그곳이라고 대답했다.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곳이야말로 지상낙원이라고 했고, 피렌체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 또한 아메리카는 왕도 정부도 사유재산도 없는 완벽한 유토피아라고 했다. 유토피아를 그리는 모험가들, 신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 '엘 도라도'를 찾아 일확천금을 꿈꾸는 정복자들이 미지의 세계로 줄이어 떠났다. 코르테스도 그중 하나였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멋진 신세계 아메리카에 대한 꿈에 부풀어 19살 때 서인도 제도로 건너갔고, 오랫동안 기회를 노린 끝에 아즈텍 정복에 도전한 것이다.
정복자의 여자
말린친은 총명했다. 그녀는 지역마다 다른 원주민 언어를 두루 알고 있었다. 스페인 어도 금방 배웠다. 코르테스는 말린친을 통역겸 애인으로 삼았다. 코르테스는 그녀를 '미 렝구아' 즉 '나의 혀'라고 부르면서 매우 아꼈다. 말린친은 카톨릭 세례를 받고 마리나라는 스페인식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원주민 인디오들은 그녀를 말린친도 마리나도 아닌 말린체라고 불렀다. 정복자의 여자, 배신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통역뿐 아니라 상담자, 조언자로 활약했다. 코르테스에게 인디오의 사고방식, 관습, 종교, 전통에 대해 설명해주고 아즈텍 제국의 구석구석을 안내해준 것은 그녀였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웅장한 도시 테노크티틀란에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목테수마가 살고 있으며, 황제의 군대가 대오를 이루면 바다에 물결이 일듯 온 땅이 뒤덮인다고 말린체는 말했다. 30개나 되는 속국들이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있긴 하지만, 속으로는 아즈텍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할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더 강한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아즈텍 제국에 등돌릴 게 틀림없다고 귀띔 해준 것도 그녀였다. 말린체가 건네준 정보와 지식은 그 어느 무기보다 미덥고 강력했다. 코르테스는 그 정보와 지식을 토대로 아즈텍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핵심은 인디오들끼리 내분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유력한 인디오 부족들이 코르테스 편에 속속 가담해왔다. 그렇게 되기까지 말린체가 부족들 사이를 오가며 능란한 언변으로 수완을 발휘했음은 물론이다.
1521년 결국 아즈텍 제국은 스페인 군대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1100만의 인구와, 온 땅을 뒤덮을 만큼 많은 군대를 가졌던 아즈텍 제국이 불과 500명 남짓한 코르테스 군에게 패한 것이다. 만약 말린체가 돕지 않았다면 코르테스의 승리는 훨씬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말린체가 아니었다면 아즈텍은 침입자의 말발굽 아래 그토록 쉽게 짓밟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말린체는 왜 코르테스에게 협력했을까? 그녀가 동족인 인디오를 외면하고 낯선 정복자의 여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해답은 그녀의 과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녀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잘 모른다. 귀족의 딸이었다는 설도 있고, 왕의 딸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코르테스에게 해준 조언이 상당한 안목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즈텍 제국에 짓밟힌 어느 작은 부족 출신일까?
말린체는 어려서부터 노예로 팔려다녔다. 물 긷기, 옥수수 빻기, 옷감짜기 같은 노동을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녀가 여러 원주민 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곳을 떠돈 때문일 것이다. 코르테스와 만났을 때, 말린체는 이미 삶의 어두움과 인간의 악덕을 실컷 맛본 여인이었다. 그녀가 동족에게서 받은 것은 멸시와 학대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참한 기억과 관련된 모든 것, 동족과 고향까지 말린체는 깡그리 부정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메스티조의 어머니
말린체는 코르테스의 아들을 낳았다. 마르틴이라는 이름의 이 아들은 인디오 여성과 스페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최초의 혼혈 아메리카 인, 그러니까 첫번째 메스티조다. 메스티조는 정복자의 피를 받은 자식이다. 오늘날 멕시코인의 60% 이상이 혼혈이며, 그중 가장 많은 것이 메스티조다. 흑인과 인디오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물라토,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은 크리오요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말린체는 오늘날 멕시코인의 어머니인 셈이다.
20세기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 중에 오로스코라는 사람이 있다. 초대형 벽화로 이름난 민족화가다. 그의 작품 가운데 <코르테스와 말린체>라는 작품이 눈을 끈다. 말린체의 손을 잡은 코르테스가 바닥에 엎드러져 있는 인디오를 발로 짓밟고 있는 그림이다. 말린체와 코르테스 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의기양양한 코르테스 옆에서 말린체는 눈을 감은 채 짓밟히는 동족을 외면하고 있다. 정복자와 정복당하는 자의 극적인 만남이다.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나름의 독특하고도 수준높은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마야, 잉카, 아즈텍의 유적들이 그 사실을 웅변한다. 아메리카 인디오 문명은 생명력 넘치는 젊은 문명이었으나 유럽의 침략을 받아 굴절되고 말았다. 지금의 라틴 아메리카는 그 침략과 굴절이 낳은 결과다.
침략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배신과 변절의 역사가 있다. 우리에게도 친일파라는 부끄러운 유산이 있지 않은가. 지금도 멕시코에서는 말린체 하면 배신자라는 뜻으로 통한다. 말린체, 그녀에게 말린친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