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연합 2001.12.28 조회 수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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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적어도 한번은 자기 자식이 누구를 닮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얼굴은 엄마를 닮았는데, 하는 행동은 꼭 나를 쏙 빼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날은 반대의 경우로 보일 때가 있다.

둘째 아이 딸은 나를 많이 닮았다. 특히 성질이 그렇다. 아내는 딸아이를 보면서 시어머니가 많이 생각난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자랄 때도 그렇고 지금 삶의 방식 곳곳에 어머니와 비슷한 면이 많음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어머니는 주변분들로부터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일을 했을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외향적인 성격과 강한 리더십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바닷가에 살았던 덕분에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부터 수영을 배웠고, 키보다도 몇배 깊은 물속에 들어가 우뭇가사리 등을 캐어 부업으로 짭짤할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겨울이면 오름에 다니면서 꿩도 잡고 눈썰매를 즐겼었다.

한쪽 다리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가늘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다리가 꼭 부러질 것 같아 걱정스러웠을 만큼 드세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당시 이런 나의 모습을 자주 보시는 동네 어른들이 나에 대하여 한마디 꼭 하던 말이 기억난다. "쯧쯧(말을 하기 전에 꼭 붙였다) 얼굴은 잘 생겼는데, 몸이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주변분들의 평가가 '남자였다면' 하는 말에는 여자의 태도는 내성적인 것이 어울리고, 남들(특히 남자)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이 여자로서 취해야할 자세라는 점을 전제로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주변의 평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어머니는 친가나 외가 친척들의 모임에서도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러한 면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늘 당당했다. 다만 외할머니는 어머니의 이러한 삶의 모습에 여러번 제동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는 여자 팔자는 남자에게 완전히 맡길 때라야 편해진다고 했다. 여자가 너무 나서면 남자기를 죽이게 되고 그러면 여자의 삶이 피곤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늘 우리 가족의 중심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장애라는 짐을 지고 살았다. 고등학교때는 선택의 여지 없이 문과반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심분야와 성향은 관심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대학가려면 문과를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실험과목이 있는 학과에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취업, 결혼 모두 장애가 문제가 되었다. "몸만 건강했으면............"

우리 사회의 팔자론은 우리 생활 곳곳에 깊게 묻어 있다. 무엇무엇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키가 얼굴이 어땠기 때문에, 어떤 지역출신이기 때문에 등등 사람이 인력으로 어쩔수 없는 이유를 들어 평생 그렇게 살아가도록 규정한다.

우리 사회에서 "∼니깐" 안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없어지기 시작하면 분명 평등세상이 가까이 오는 징조일 것이다. 적어도 우리 딸은 여자니깐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