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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딸과 힘든 아들의 평등·평화를 위한 序曲

지난 20세기까지의 남녀(딸과 아들) 관계나 상황을 가장 잘 압축한 표현을 들라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남성은 힘들고 여성은 아프다’를 든다. 이 지적에 연관된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이유는 논외로 하더라도,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 問題的 이 표현은 반드시 고쳐지고 달라져야 함에 별반 이의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거의 절반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남녀이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많은 얘기와 논란을 담보하고 있는 부분 또한 이와 관련한 것이 분명하다. ‘결혼을 했다’ 라는 상대편의 얘기를 듣는 순간 거의 습관적으로(특히 우리의 경우-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정도로) 물어보는 것인즉, ‘자녀는 있습니까?’에 뒤이어(있다/없다 라는 대답에 거의 상관없이) ‘아들입니까, 딸입니까?’라고 꼬치꼬치 묻기까지를 즐기는 것 같다.

특별히 「男性學과 男性運動」을 연구·활동하게 된 연유로, 다소 무의미에 무례를 저지르는(잘못된 관심과 친밀감을 빙자한) 이 같은 질문에 보통의 상투적인 답(例:‘아들입니다’-당당한 태도, ‘딸입니다’- 주눅든 태도)을 가능한 대로 회피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러다 보니 별별 희안한 반응을 경험하기까지 한다. 즉 ‘아들이냐 딸이냐?’는 상대편의 질문에 내가 무반응이거나 주저주저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 딸인 모양이지요!”라고 외쳐댄다. 아니면 전에 어떤 사람처럼 “혹시 장애 아이를 두신 것 아닙니까?” 라고 까지 오-버를 해버린다.

일본남성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타인의 자녀성별에 초월

결혼한 내가 아들을 두었느냐 혹은 딸이다 못해 장애 아이(?)를 두었느냐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답변(타인에 대한 물음을 포함)이 내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의 결정적인 이유는 더 있다.

1996년 이후 매년 9월 둘째 주 토∼일요일의 양일간에 걸쳐, 남성의 여러 가지 문제·입장들을 연구와 운동차원에서, 정말 다양하고 심도 있게 접근하고 있는 소위 「일본 남성 Festival」을 줄곧 참석해 오는 가운데 알게된 ‘불문율’이 바로 그것이다.

페스티벌에 참석하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능한대로 지켜야 하는 이 불문율(타인에게 묻거나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당신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②어디에서 왔습니까/ 어디 출신입니까 ③회사(일하는 곳)에서의 직책이 무엇입니까?

이렇듯 나는 결국 자연 본래적임을 포함하여, 「일본 남성 페스티벌」의 첫 번째 불문율을 충실하게 지키기 위함에서도 나와 타인에 대한 자녀의 성별 물음과 대답에 남다른 무관심 무가치의 초월성을 함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딸사랑아버지모임' 공동대표 우연 아닌 필연

그러던 차에 결코 우연이 아니게(거의 필연적으로) 소위 『딸 사랑 아버지모임』에 발을 들여놓게 된데다 황송하게도 ‘공동대표’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우리의 이 모임은 (1)평등하고 열린 아버지 像을 창조하자 (2)여성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가족 및 사회문화를 마련하자 (3)불평등한 가족문화를 조장하는 호주제도의 폐지에 앞장서자 라는 세 가지를 발족배경의 기본으로 하는 ‘딸 아들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는’ 일종의 「가정 및 사회의 평등·평화운동」 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지난 6월 22일의 발족 이후,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분들의 예비 발기 시점의 소극적인 참여를 넘어선, 그야말로 평범한 아버지들의 기다린 듯이 나타나는 높은 관심과 열의는, 이 모임 발족의 만시지탄(晩時之歎)만큼 사회적인 의의와 반향을 담고있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우리는 이 모임을 발족하면서 다음과 같은 『딸 사랑 아버지 선언』을 채택하였다.

『우리 아버지들은 지금까지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끄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해오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딸 사랑 아버지모임'을 통해 새로운 아버지로서 거듭 태어날 것임을 선언한다.』

1. 가정생활에 애정과 시간을 투자하여 육아와 가사 등 역할과 책임을 분담하는 평등하고 열린 아버지가 되도록 노력한다.

2. 딸·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한 책임과 역할을 배워가도록 평등하게 키운다.

3. 내 자녀만을 사랑하는 편협한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의 아버지로서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해 역할과 책임을 다할 것을 선언한다.

4.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업과 사회제도 개선운동을 함께 해 나갈 것을 약속한다.

5. 딸들이 스스로의 주인으로 설 수 있도록 남녀차별과 남아선호사상을 조장하는 호주제도를 폐지하는 일에 앞장선다.

굳이(집요하게) 물어보기에 대답을 하는 바, “아들만 하나 두신 입장에서 어떻게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까?” 라는 연장선상의 습관성 질문에 대해 내가 다음처럼 대답하면 대체로 수긍에 찬동을 하는 편이다.


“제 아들을 키우는 지난 9년 동안 딱 한번 이렇게 얘기했을 뿐입니다. 뭐 이런 류의 얘기(지적·비난 등) 많이 있지요! ‘남자애가 왜 그러니, 너 남자 맞니 혹은 사내애가 되어 가지고 왜 그러니’ 등등. 제 아이에게 지금까지 단 한번 얘기한 것도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힘든 제 결심의 의지가 훼손된 것 같아서요! 유감스럽게도 아들을 둔 아버지들은 물론 딸을 둔 요즈음의 젊은 아버지들이 지금도 부지불식간 구태의연한 性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언사를 구사하는 가운데, 그들의 자녀를 대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아들가진 아버지가 남녀를 평등하게 키우면 더 효과적

참으로 중요한 것은 점차 크게 변화되어 가는 남녀의 관계에서, 미래의 큰 주인공이 될 딸을 상대로 한 아버지들의 處事 못지 않게, 아들을 상대로 한 아버지들의 제대로 된 사고방식이나 태도·행동 등입니다.

왜냐하면 남녀의 불행했던 지난 역사적인 관계상의 시행착오를 가능한대로 줄임과 동시에, 평등하고 행복한 미래를 일구어 나가는데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상대인 우리의 딸과 아들) 어느 한쪽만의 책임과 숙명이 결코 아닌, 동시 상호 작용·관계의 그 의의와 필요성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딸을 두고 있는 아버지(남자)가 자연스럽게 혹은 불가피하게 최고의 페미니스트(feminist)가 되는 것 이상으로, 아들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 남녀를 평등하고 참되게 잘 키우는 것은 그것에 결코 못지 않은 倍加의 효과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딸 사랑 아버지모임』에 참여하게 된 또 다른 작은 계기는, 딸을 가진 아버지들이 다음에 소개하는 詩(문정희 作, ‘남자를 위하여’)를 읽었을 때, 그 직접 대상인 당사자들로서 내가 느낀 것 이상으로 의미심장한 전율을 느끼고 영원히 간직하기를 바램에서였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神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이제 정말 더 이상 모두는 단지 ‘딸’이라는 이름의 이유만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지우고 죽이는 잔인한 어리석음의 반복에 그 직접적인 가해자들은 물론 간접적인 방조자도 결코 되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통계상으로 잡힌 숫자만으로도 년 평균 3만여 갓난 아이들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더 이상 피워보지도 못하고 어머니 뱃속에서 그대로 ‘神의 출구’가 강제 폐쇄된 채, 죽음의 길로 떨어지는 참으로 천인공노할 일들이 아직도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음에 모두가 자성할 일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더 하여, 요행히 설사 태어났다 하더라도 커가면서 점차 느끼고 처절히 경험하는 ‘여자’라는 이유의 현실의 크고 작은 걸림돌들은 우리의 딸들을 옥죄고 강제화하기에 차고 넘친다. 참고로 ‘여자로서 불리하고 불편한 점’에 대한 여성 자신들의 답변을 조사한 내용을 순위별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사회진출 및 활동(예: 자아성취 및 능력발휘)의 제약 ②일상생활(예: 외출·외박 등)의 차별로 인한 불리 불평등한 대우 및 평가 ③신체적으로 불리 ④‘여자’라는 것에 대한 강요 ⑤육아 양육 및 가사 일에 대한 부담 등

그렇다면 모두가 똑같이 맞이한 새로운 세기에, 과연 우리의 딸과 아들을 어떻게 키우고 성장시킬 것인가? 제도적인 측면은 물론 일상 생활의 非제도 정서적 측면 등의 여러 면에서, 지금까지보다는 더욱 더 혁신적이고 참신한 것들을 동원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딸은 당당하게 아들은 부드럽게, 고정관념을 깨보세요!’라는 최근 外誌상(레이디스 홈 저널)의 「자녀 키우기」 방법·내용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딸은 당당하게, 아들은 부드럽게

<<여성 및 남성의 성 역할 구분이 선척적이든 후천적이든 딸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더욱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당당함을, 아들에게는 여성의 일을 덜어주는 인간적 배려를 갖게 해야 하는데, 「딸 키우기, 아들 키우기」 그 4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 딸을 당당하게 키우는 법

1. 운동을 좋아하게 만든다. 신체를 활발하게 움직이는 운동은 심신을 건강하게 연결 시켜 주는 훌륭한 매개가 된다.

2. 현명한 소비자가 되도록 유도한다. 텔레비전을 함께 보면서 광고에 대한 얘기한다. 광고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여성의 성적 매력’, ‘여성의 역할’ 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3. 예의바른 행동과 여성스러움 행동을 구별하도록 한다. 수줍어하고 침묵을 지키고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여성이 되지 않도록 일깨워준다.

4. 부모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 속에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지 주의한다.

■아들을 부드럽게 키우는 법

1. 광고를 함께 보면서 분별력을 키워준다.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담긴 광고의 배경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2. 아들이 하고 있는 운동을 잘 살펴본다. 혹시 코치가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지시한다든지 무조건 공격성만 키우는 운동이라면 그만두게 한다.

3. 만약 아들이 친절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칭찬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감성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 아들에게도 딸과 같은 비중으로 집안 일을 하게 한다. 아기를 보게 하고 식탁을 차리게 한다. 집안일과 담쌓은 남자는 가정을 원만하게 이끌기 힘들다.


이렇게 하여 ‘여자는 아프고 남자는 힘들다 ’라는 지난 20세기까지 우리 식의 남녀관계 및 상황에 대한 압축된 표현이, ‘아들은 행복하고 딸은 더 행복하다!’라는 것으로 가능한 한 빨리 고쳐지도록, 모두가 특히 이 땅의 아버지들이 (너 나의 구별 없이) 발벗고 앞장서야 한다. 아버지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