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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녀평등을 주제로 하는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본 일이다. 토론의 진행자가 여성학자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으십니까?”라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남성으로 태어나고싶다”라는 것이었다.

이 대답은 아직도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심하기 때문에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여성학자는 “하루 한시라도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잊고 마음 편하게 산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아파트 1층의 엘리베이터 앞에서의 일이다. 5-6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도 타지 않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아이의 어머니가 낯선 남자 어른과 단 둘일 경우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라고 가르쳤던 모양이다. 치한이 나타날 경우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천진스런 그 아이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또 여대생들의 경우 저녁에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 택시로 귀가 할 경우, 다른 친구들이 그 택시의 등록번호를 수첩에 적어 놓는다고 한다. 택시 운전사가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곳으로 납치해 갈 경우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공공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에도 여성으로서 감수하는 불편함이 너무 크다. 출퇴근시 사람이 많은 지하철 속에서 남성들이 지나치게 밀착하거나 그것을 넘어서 엉뚱한 손을 뻗치는 수작을 당해보지 않은 여성이 드물 것이다.

그뿐인가. 지하철의 긴 좌석에서 여성들은 두 다리를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반면에 남성들은 두 다리를 자유롭게 벌려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 공간에서의 무의식적 남녀불평등 현상인 것이다.

남성문화속에 생각 없이 살아가다 보면 이런 현상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주입된 남녀차별을 생활화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 각인되어 결코 의식의 수준으로 떠오르지 않는 아주 오래된 차별의 관습들이 일상 생활의 곳곳에 널려있는 것이다. 이제 여성들은 이와 같은 매일 체험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경험들을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여성의 입장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지배와 정복, 경쟁에서의 승리를 추구하는 남성문화 속에 길들여진 남성들에게 그런 일들은 하찮은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는 자신과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사소통 능력은 지식의 많고 적음에 있기 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제 이 땅의 남성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여성의 삶을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여성을 윽박지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자기 중심적이며 유아적인 남성문화의 폐쇄성을 깨고 여성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고정된 남성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세상은 삭막하고 살벌하고 몰인정한 경쟁의 장일 뿐이며 타인은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제 남성들이 여성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서로 나누고 돕고 보살피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여성의 입장이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자신의 아내나 딸이나 어머니의 입장에서 가족과 직장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설명해보는 자기 성찰과 자기 훈련의 시간을 마련해 볼 일이다. 그 때,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경직된 남성의 눈은 유연한 남성의 눈으로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