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조선 왕조 마지막 황태자인 그의 이름은 은(垠)이다. 그는 11살 때 일본으로 가 일본 황실의 공주 마사코(李方子)와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마사코와 결혼하기 전, 그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민갑완(閔甲完)이 바로 그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11살의 신부
민갑완은 여흥 민씨 민영돈(閔泳敦)의 딸이다. 민영돈은 명성왕후의 신임을 받아 그 아들 척(훗날의 순종)의 글벗이 되고, 종묘제관을 거쳐 초대 영국공사로 활약한 인물이다.
1897년 10월 20일, 민영돈의 집과 대궐 양쪽에서 각각 새 생명이 태어났다. 민영돈의 딸에게는 갑완이란 이름이, 고종의 후궁 순빈 엄씨가 낳은 아들에게는 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듯 민갑완과 이 은은 운명처럼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태어났다.
민갑완은 활달하고 총명한 소녀였다. 어찌나 장난이 심했는지 별명이 ‘난봉’이었다. 할머니의 환갑년에 태어났다 하여 갑완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을 만큼 그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아버지 민영돈 또한 그의 총명을 아꼈다.
민갑완이 11살 되던 해인 1907년 초, 세자빈을 간택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왕비 간택, 이는 거국적인 행사였다. 일단 간택이 시작되면 전국의 결혼 적령기 처녀들에게 금혼령이 내려지고, 나이 찬 처녀를 둔 집에서는 사주단자를 올린다. 3차에 걸친 심사를 하여 왕비를 결정하는데 이를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이라 한다. 마지막 삼간택에는 세 명의 최종 후보가 올라가 그중 한 사람을 정한다. 간택이 공정한 경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문 혹은 세도에 의해 당선자를 미리 내정해두고, 간택이란 형식을 밟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쨌든 민갑완은 삼간택까지 올라가 세자빈으로 뽑혔다. 이제 남은 일은 택일을 하여 혼례를 올리는 일 뿐이었다.
그런데 몇달 후,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시켰다.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했고, 순종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이복동생 은이 다음번 왕위계승자로 확정되었다. 민영돈은 딸의 운명이 순탄치 않으리란 예감을 했다.
“이 일을 어찌할꼬? 나라는 점점 기울어가는데, 갑완이 너는 국모로 들어가게 되고...국운이 기울 땐 차라리 평민이 행복하거늘. 아아, 너도 이 나라도 막막하고 답답하고나.”
10년만의 파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 은을 일본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야 일본의 식민통치가 쉬워질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에게 말했다.
“일국의 황태자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나라, 그것도 대궐 안에서만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해외유학 하시어 견문도 넓힐 겸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심이 옳습니다.”
말이 유학이지 사실상 볼모였건만, 순종은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11살의 은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갑완은 어느새 21살의 과년한 처녀가 되었고, 그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도 왕실은 남아 있었다. 일본은 조선 왕족들에게 작위를 주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10년을 하루같이 은의 귀국과 혼례식 올릴 날만을 기다리며 책을 벗삼아 지내던 갑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왔다. 파혼이라는 것이다. 은이 일본 황실의 공주와 결혼하리란 소식도 뒤를 이었다. 약혼 신물(信物)로 받은 반지를 되찾아가기 위해 궁에서 상궁이 나왔다. 1917년 12월의 일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간택을 치르고 신물까지 나눈 지 10년이 되는 오늘에 와서 상의 뜻이 변하셨단 말씀이오?”
기막혀하는 민씨 일가에게 상궁이 대답했다.
“총독부에서 명한 일이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왕세자님께서는 일본의 황족 공주와 결혼하신답니다. 그러니 신물은 가지고 있어 무엇합니까?”
일본은 조선왕가의 명맥을 끊어버리려고 ‘조선 왕족은 일본의 황족이나 귀족하고만 결혼하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했다. 그런 다음 은과 마사코를 결혼시키기 위해 민갑완과의 약혼을 파기케 한 것이다.
조선 왕실의 법도에 따르면, 한번 왕비로 간택된 사람은 설령 파혼되더라도 결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총독부에서는 갑완의 아버지에게 ‘딸을 1년 안으로 다른 곳에 시집보내지 않으면 부녀가 중죄를 받아도 좋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뿐만 아니라 갑완을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애를 썼다. 겁탈하여 강제로 결혼시키려는 계략을 꾸민 적도 있었다.
상해로 망명
1920년 4월 영친왕 은은 일본에서 마사코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간 두 사람은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일합방이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님을 전세계에 ‘입증’시켰다.
갑완을 아껴주던 할머니도, 아버지 민영돈도 세상을 떠났고, 고종 역시 세상을 떠났다. 좌절할 대로 좌절한 갑완은 차라리 죽어버리자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외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해로 망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상해 가면 네 마음대로 해라. 아무도 널 막지 않을 테니 생각대로 뜻대로 해라.”
상해로 가는 배에 오르는 갑완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왕실의 법도도, 관습과 전통에도 매일 필요없으니 자유롭게 살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동생 천행, 외삼촌 기현과 상해에 도착한 갑완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김규식의 소개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신식학문을 배우며 활기를 되찾을 무렵, 학교마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영사관에서 찾아와 이것저것 갑완에 대해 캐묻자 난처해진 교장이 학교를 쉬게 한 것이다. 갑완은 또 한번 좌절했다.
김규식은 갑완에게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권했다.
“우리 같이 싸웁시다. 싸워서 이기는 길만이 내 나라 내 민족을 구하는 길이요, 원수를 갚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갑완은 거절했다.
“이 모든 것은 제 운명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일이 아니라 생각되오며 저 혼자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실에 무슨 힘이 있었습니까? 저를 이 꼴로 만들었다고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만약 이때 갑완이 김규식의 권유대로 독립운동에 나섰더라면 그의 삶은 참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갑완은 철저히 왕가의 여인이었다. 10년 동안 오로지 충실한 왕가의 여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다져오지 않았던가?
“나는 돌아가지 않으련다”
아무런 출구도 보이지 않는 세월들이 흘러갔다. 책 읽기와 뜨개질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활달하던 성격도 변했다. 갑완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몇 번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조리 거절했다. 그로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요 자신을 지키는 길이었다.
이런 생활이 무려 25년, 갑완은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마침내 식민지 지배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귀국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돌아가면 반겨 맞을 사람이 있니, 아니면 다시 이 왕가가 복위되어 절개를 지켰다고 상을 내리겠니? 나는 돌아가지 않으련다.”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는 해방이 되면 왕조가 복위되고 자신도 황태자비가 되리란 기대를 은연중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금, 아무도 왕 따윈 생각지 않았다. 그는 조선 여자의 윤리와 도덕을 지키기 위해 정절을 지키고 왕가와 맺어졌다 깨어진 혼약에 일생을 건 자신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5월, 민갑완은 고국 땅을 밟았다. 이시영,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국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히 고독과 가난뿐이었다. 그는 여관, 친척집, 동생 집을 전전하다가 영친왕의 동생인 의친왕 강(堈)의 호의로 사동궁 2층에서 살게 되었다.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교육사업을 준비했다. 육영사업후원회를 구성하고 그 첫번째 모임을 열기 바로 전날, 6.25 전쟁이 터졌다. 그가 일생에 마지막으로 계획하고 준비했던 일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1963년 11월 영친왕 은이 귀국했다. 뇌연화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채. 11살의 나이로 조선을 떠난 지 56년만이었다.
“나는 이미 조선인이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이 되지도 않아.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설픈 삶을 살 수밖에 없어.”
영친왕은 늘 이렇게 뇌이곤 했었다. 영친왕은 돌아왔지만 민갑완과는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생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영친왕은 민갑완의 존재를 기억하고나 있었을까?
1968년 3월 19일 민갑완은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1살, 기다림으로 일관한 생을 마감한 그의 육신은 부산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혔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11살의 신부
민갑완은 여흥 민씨 민영돈(閔泳敦)의 딸이다. 민영돈은 명성왕후의 신임을 받아 그 아들 척(훗날의 순종)의 글벗이 되고, 종묘제관을 거쳐 초대 영국공사로 활약한 인물이다.
1897년 10월 20일, 민영돈의 집과 대궐 양쪽에서 각각 새 생명이 태어났다. 민영돈의 딸에게는 갑완이란 이름이, 고종의 후궁 순빈 엄씨가 낳은 아들에게는 은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렇듯 민갑완과 이 은은 운명처럼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태어났다.
민갑완은 활달하고 총명한 소녀였다. 어찌나 장난이 심했는지 별명이 ‘난봉’이었다. 할머니의 환갑년에 태어났다 하여 갑완이란 이름을 붙여주었을 만큼 그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아버지 민영돈 또한 그의 총명을 아꼈다.
민갑완이 11살 되던 해인 1907년 초, 세자빈을 간택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왕비 간택, 이는 거국적인 행사였다. 일단 간택이 시작되면 전국의 결혼 적령기 처녀들에게 금혼령이 내려지고, 나이 찬 처녀를 둔 집에서는 사주단자를 올린다. 3차에 걸친 심사를 하여 왕비를 결정하는데 이를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이라 한다. 마지막 삼간택에는 세 명의 최종 후보가 올라가 그중 한 사람을 정한다. 간택이 공정한 경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문 혹은 세도에 의해 당선자를 미리 내정해두고, 간택이란 형식을 밟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쨌든 민갑완은 삼간택까지 올라가 세자빈으로 뽑혔다. 이제 남은 일은 택일을 하여 혼례를 올리는 일 뿐이었다.
그런데 몇달 후, 헤이그 밀사 사건을 트집잡아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시켰다.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했고, 순종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이복동생 은이 다음번 왕위계승자로 확정되었다. 민영돈은 딸의 운명이 순탄치 않으리란 예감을 했다.
“이 일을 어찌할꼬? 나라는 점점 기울어가는데, 갑완이 너는 국모로 들어가게 되고...국운이 기울 땐 차라리 평민이 행복하거늘. 아아, 너도 이 나라도 막막하고 답답하고나.”
10년만의 파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영친왕 은을 일본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야 일본의 식민통치가 쉬워질 거라는 계산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에게 말했다.
“일국의 황태자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나라, 그것도 대궐 안에서만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해외유학 하시어 견문도 넓힐 겸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심이 옳습니다.”
말이 유학이지 사실상 볼모였건만, 순종은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11살의 은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갑완은 어느새 21살의 과년한 처녀가 되었고, 그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도 왕실은 남아 있었다. 일본은 조선 왕족들에게 작위를 주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10년을 하루같이 은의 귀국과 혼례식 올릴 날만을 기다리며 책을 벗삼아 지내던 갑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왔다. 파혼이라는 것이다. 은이 일본 황실의 공주와 결혼하리란 소식도 뒤를 이었다. 약혼 신물(信物)로 받은 반지를 되찾아가기 위해 궁에서 상궁이 나왔다. 1917년 12월의 일이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간택을 치르고 신물까지 나눈 지 10년이 되는 오늘에 와서 상의 뜻이 변하셨단 말씀이오?”
기막혀하는 민씨 일가에게 상궁이 대답했다.
“총독부에서 명한 일이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왕세자님께서는 일본의 황족 공주와 결혼하신답니다. 그러니 신물은 가지고 있어 무엇합니까?”
일본은 조선왕가의 명맥을 끊어버리려고 ‘조선 왕족은 일본의 황족이나 귀족하고만 결혼하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했다. 그런 다음 은과 마사코를 결혼시키기 위해 민갑완과의 약혼을 파기케 한 것이다.
조선 왕실의 법도에 따르면, 한번 왕비로 간택된 사람은 설령 파혼되더라도 결코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총독부에서는 갑완의 아버지에게 ‘딸을 1년 안으로 다른 곳에 시집보내지 않으면 부녀가 중죄를 받아도 좋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뿐만 아니라 갑완을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애를 썼다. 겁탈하여 강제로 결혼시키려는 계략을 꾸민 적도 있었다.
상해로 망명
1920년 4월 영친왕 은은 일본에서 마사코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간 두 사람은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한일합방이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님을 전세계에 ‘입증’시켰다.
갑완을 아껴주던 할머니도, 아버지 민영돈도 세상을 떠났고, 고종 역시 세상을 떠났다. 좌절할 대로 좌절한 갑완은 차라리 죽어버리자는 생각을 여러 번 했지만, 외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해로 망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상해 가면 네 마음대로 해라. 아무도 널 막지 않을 테니 생각대로 뜻대로 해라.”
상해로 가는 배에 오르는 갑완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왕실의 법도도, 관습과 전통에도 매일 필요없으니 자유롭게 살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동생 천행, 외삼촌 기현과 상해에 도착한 갑완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김규식의 소개로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신식학문을 배우며 활기를 되찾을 무렵, 학교마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영사관에서 찾아와 이것저것 갑완에 대해 캐묻자 난처해진 교장이 학교를 쉬게 한 것이다. 갑완은 또 한번 좌절했다.
김규식은 갑완에게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권했다.
“우리 같이 싸웁시다. 싸워서 이기는 길만이 내 나라 내 민족을 구하는 길이요, 원수를 갚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갑완은 거절했다.
“이 모든 것은 제 운명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일이 아니라 생각되오며 저 혼자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실에 무슨 힘이 있었습니까? 저를 이 꼴로 만들었다고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만약 이때 갑완이 김규식의 권유대로 독립운동에 나섰더라면 그의 삶은 참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갑완은 철저히 왕가의 여인이었다. 10년 동안 오로지 충실한 왕가의 여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다져오지 않았던가?
“나는 돌아가지 않으련다”
아무런 출구도 보이지 않는 세월들이 흘러갔다. 책 읽기와 뜨개질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활달하던 성격도 변했다. 갑완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고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몇 번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조리 거절했다. 그로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요 자신을 지키는 길이었다.
이런 생활이 무려 25년, 갑완은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마침내 식민지 지배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그는 귀국하지 않으려 했다.
“내가 돌아가면 반겨 맞을 사람이 있니, 아니면 다시 이 왕가가 복위되어 절개를 지켰다고 상을 내리겠니? 나는 돌아가지 않으련다.”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는 해방이 되면 왕조가 복위되고 자신도 황태자비가 되리란 기대를 은연중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금, 아무도 왕 따윈 생각지 않았다. 그는 조선 여자의 윤리와 도덕을 지키기 위해 정절을 지키고 왕가와 맺어졌다 깨어진 혼약에 일생을 건 자신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5월, 민갑완은 고국 땅을 밟았다. 이시영,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귀국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히 고독과 가난뿐이었다. 그는 여관, 친척집, 동생 집을 전전하다가 영친왕의 동생인 의친왕 강(堈)의 호의로 사동궁 2층에서 살게 되었다.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그는 교육사업을 준비했다. 육영사업후원회를 구성하고 그 첫번째 모임을 열기 바로 전날, 6.25 전쟁이 터졌다. 그가 일생에 마지막으로 계획하고 준비했던 일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1963년 11월 영친왕 은이 귀국했다. 뇌연화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채. 11살의 나이로 조선을 떠난 지 56년만이었다.
“나는 이미 조선인이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이 되지도 않아.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설픈 삶을 살 수밖에 없어.”
영친왕은 늘 이렇게 뇌이곤 했었다. 영친왕은 돌아왔지만 민갑완과는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생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영친왕은 민갑완의 존재를 기억하고나 있었을까?
1968년 3월 19일 민갑완은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1살, 기다림으로 일관한 생을 마감한 그의 육신은 부산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