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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포스코 라면 상무' 사건 이후 인터넷 공간에 등장한 기발한 라면 패러디를 본 적이 있는가? 이 패러디는 '라면 상무'에게 화근이 된 그의 라면을 모방함으로써 '승무원에게 라면으로 상징되는 절대적인 서비스를 명령할 수 있는 그의 권위'를 조롱하고 있다. 라면 패러디에 의해 조롱된 권위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남성적 권위주의의 포악함, 사회적 특권의식에 함몰된 도덕성, 그리고 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사회문화 등 이 패러디는 한국 사회의 문제적 단면들을 우스꽝스럽게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다. 감정노동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였다. 관심조차 없었던 감정노동이라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문제화된 사실 자체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라면 상무'와 '가련한 여승무원'이라는 구도를 강조하며 단순히 '갑의 횡포'를 비난하는 방식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감이 있다. 비록 진부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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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감정노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감정노동은 노동의 문제이자 인간소외의 문제이다. 그것은 감정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비스 산업이 비대해진 산업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이렇게 본다면, 라면 패러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감정노동의 피해자들이다. 승무원은 물론이고 타인의 감정에 무감각한 '라면 상무'까지도.

소외된 노동의 단면, 감정'노동자'

감정노동의 첫 번째 피해자는 '감정노동자'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배우가 연기를 하듯 타인의 감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수행한다. 감정노동을 처음으로 개념화한 사회학자 혹실드(A.R.Hochschild)는 이를 서비스산업 중심의 경제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양상이자 특징으로 정리했다. 때문에 감정노동자들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나타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형적인 노동자'와는 약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형적인 노동자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한 노동을 통해 상품을 생산해낸다.

반면, 비행기 승무원이나 콜센터 직원, 보육교사와 같은 감정노동자에 대해서는 '미소, 응대, 놀아주기' 등 주로 감정적 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게다가 그들이 생산하는 무형의 서비스는 그들 역시 '노동을 통한 상품 생산'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감정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노동과정과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소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그들 역시 일하는 동안 자신의 진짜 감정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산하는 서비스로부터도 소외당하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인식은 감정노동자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취약하게 만든다. 영화 <모던타임즈>의 찰리채플린이 잘 보여주듯이 노동소외라는 개념은 인간을 한낱 기계부품으로 취급한다. 현대 사회의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착취구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에 저항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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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정노동자는 어떤가? 그들이 '전형적인 노동자'와 다르게 취급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어떻게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감정노동을 '노동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라면 상무'가 포스코 공장이나 회사의 여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하면서 그 커피가 맛이 없다고 다시 만들 것을 계속 지시하며 급기야 폭력까지 행사했다면,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명백한 괴롭힘이자 학대로 인지될 것이다. 그러나 비즈니스 클래스의 손님이 승무원에게 라면을 주문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다시 끓여오라고 명령하는 것은, 손님의 유별남과 그런 진상 손님을 만난 승무원의 불운으로 인지될 가능성이 크다. 폭력은 손님의 오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서 승무원은 과연 '노동자'일 수 있을까?

소외된 인간의 단면, '고객님'

감정노동의 두 번째 피해자는 거대한 서비스 소비시장의 그물망 가운데서 왕이 되길 강요당한 자들, 바로 '고객'들이다. 생각해보라. 고객만족을 넘어 최근에는 고객졸도경영을 지향하는 서비스경영 전략이 취급하는 대상이 정말 '왕'인 손님인가? 비행기 승무원의 친절함이나 콜센터 상담원의 사려 깊은 경청 태도가 왕의 권위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과 사랑의 표시인가? 그럴 수 없다. 당신이 지불을 통해 그들의 서비스를 구매하는 한, 그것은 감정노동자의 진짜 감정 같은 건 아무 쓸모가 없는 무미건조한 경제적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도 '손님이 왕'이라면 그 왕은 아첨과 간신에 의해 조종되는 즉, 서비스 제공자의 입맛에 맞게 구워지고 삶아지는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왕을 의미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간신에게 농락당하고 향락에 빠져 살다간 왕들은 대개 폭군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문제는 감정노동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 수용자의 상당수가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신을 그런 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라면 패러디로 돌아가보자. '라면 상무'는 이렇게 탄식할지도 모른다. "내가 낸 돈이 얼만데 저 승무원은 내 입에 맞는 라면 하나 끓이지 못해 내 심기를 건든단 말인가!" 그는 합당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라는 논리로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승무원을 폭행하지 않았다면, 그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라면 상무'는 아마도 항공권을 구매한 순간부터 항공사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폭군으로 설정했던 것이 아닐까? 폭군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일이 얼마나 폭력적인가에 대한 인식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라면 상무'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 명의 서비스 구매자로서, 고객으로서 감정노동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과연 어떤가? 콜센터 직원의 친절한 응대, 보육교사의 다정한 보살핌 등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감정이 상품화된 서비스시장의 구조 속에서 '손님은 왕'이 되도록 요구된다. 그 왕은 폭군적 기질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기 어려운 인간이다. 우리는 그런 요구에 길들여진 나머지 감정노동자라는 타인의 '감정'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이렇게 많은 피해자를 양산해내는 감정노동의 현실에 대한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얼마 전 국회에서 개최된 감정노동 관련 토론회에 따르면, 여전히 대도시 시민들의 절반 이상이 감정노동에 대해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정신적 학대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 요구와 서비스 경영의 불합리한 지향성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감정노동이 단지 감정노동자 개인 혹은 잘못된 관행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노동 문제임에 대한 자각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글 : 문화주(한국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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