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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연합 호주제폐지 자축연에 오한숙희씨 3모녀가 다함께 참석하여 기쁨을 같이 했다. ⓒ 한국여성단체연합 | ||
지하철에 어머니를 모시고 딸을 데리고 나란히 앉아서 건너편 차창에 비친 우리를 보니 역시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또 다시 들었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내가 딸을 낳았으니 이 보다 더 명실상부한 삼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름만 듣고 보면 도대체 우리 셋은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니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어디 있을가. 아직도 한참 기다려야되는 세월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호주제가 폐지된 것으로 얼마간의 위로를 삼으며 서대문으로 향했다.
들어가는 입구에 보라색 카펫! 이게 말로만 듣던 영화배우들이 밟고 간다는 비단길? 그래, 오늘은 우리가 주연배우지! 봄볕이 가득 쏟아지는 파란 잔디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모두 밝고 행복해 하는 표정, 서로 반기며 기뻐하고 애썼다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감사하는 분위기, 한마디로 여기가 바로 천국이었다.
좀 늦게 당도하여 음식이 부족해도 전혀 모자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고한 사람들 하나 하나에게 ‘호주제 폐지 공로상’을 줄 때는 주는 이의 감사와 받는 이의 감격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들었다. 김미화씨와 권해효씨가 연출한 수상자의 모습은 보통 시상이 갖는 의례적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를 유쾌하게 만들어주었다. 국회의원, 변호사, 이른바 권위있는 직업의 종사자들도 그 자리에서는 편안하고 소박하게 자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그 자리는 동지들의 우정어린 자리였다. 그 압권은 역시 지은희 전 여성부장관과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즉석에서 보여준 환상의 콤비플레이였다. 물론 두 여성장관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고 하여 호주제 폐지 법안을 움직일 수 없는 국가적 추진과제로 각인시킨 것도 콤비플레이라 할 것이었지만 그날의 콤비플레이는 순전히 구경꾼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좀 늦게 당도한 강 장관에게 지 장관은 수상자 모두가 답례로 노래를 했다고 했다. 강 장관이 의심스러운 듯 법조인답게 확인을 했다.
"정말? 아닌 거 같애. 자기도 했어?"
관객들이 들켰구나 낙심하려는 순간 지 장관이 천연덕스럽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냈다.
"나야, 동요 불렀지. 노래 못하는 거 알잖아. 그렇지만 자기는 실력발휘해서 멋진 걸로 해야돼. 늦은 벌도 있고"
덕분에 ‘봄날은 간다’로 말로만 듣던 강장관의 노래솜씨를 맛 보는 행운을 누렸다.
권해효씨가 보여준 ‘즉석 통키타 공연’ 역시 복권당첨이었다. 오죽하면 주말마다 콘써트를 열면 여성단체 연합이 이 집을 아예 살수 있는 기금마련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나왔을까. 권해효씨는 ‘이 자리에 딸을 데리고 오고 싶었으나 거절당했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순간 함께 따라와 준 딸아이가 고마웠다. 그리고 함께 와주신 어머니가 고마웠다.
사회자 최광기가 내게도 한 마디 할 기회를 주려 했지만 나는 얼른 분위기를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올 것 같아서였다. 13년전 이혼하면서 나는 아이들의 성을 내 성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성은 커녕 호적상 아이들은 나와 무관한 처지였다. 내가 낳은 자식들을 내가 키우고 있건만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가. 그때의 심경은 무력감과 굴욕감과 분노가 한데 엉킨 것이었다. 나는 내 성씨를 붙힌 아이들의 이름을 커다랗게 써서 방 창문에 붙혀 두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한이 풀리는구나 싶었다. 딸아이는 나의 성 ‘오한’에서 외할머니 계보의 한씨를 택해 ‘장한희록’이되었다. 그러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안 해도 장한 사람이 된 거야. 히히’ 아주 흡족해했다.
이미 오숙희로 알려진 터라 오한숙희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아는 경우도 있었고 오한숙으로 엉뚱하게 불리는 일도 있었다. 설혹 손해를 본다해도 어머니 성을 함께 쓰는 것이 나는 당당하고 즐거웠다.
어떤 사람은 내게 이제 호주제도 폐지되었으니 다시 오숙희로 돌아와도 되지않냐고 한다. 어머니의 존재를 더구나 살아계신 그 분의 존재를 이제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그만이라니! 어머니성 함께 쓰기는 호주제 폐지의 도구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존재를, 딸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여정에서 호주제 폐지는 거쳐가야 할 하나의 정류장이었을 분이다. 그 정류장을 지나 우리는 이제 다음 역으로 간다. 거기서는 어머니 성을 따른 아이들이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또 하나의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남녀차별이란 말이 지구문명에서 사라지는 종착역까지 다음 정류장, 또 다음 정류장이 이어질 것이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또 다시 차창에 비친 우리 모녀 3대를 보았다. 우리 속에 흐르는 생명의 계보는 이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엄존하는 ‘시대현실’이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