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연합 '온콘' 2014 기획 시리즈_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
흔히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 이라는 말이 덕담처럼 쓰이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틀린 몸이 아닌 다른 몸으로 사는 사람들이, 그 다른 몸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온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유영희 상임대표를 10월 7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만났다.
고래) 인사를 부탁드려요.
예. 저는 사단법인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 유영희입니다.
고래) 언제부터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계신지요?
상임대표는 올 2월부터 시작을 했고요, 2007년부터 올 1월말까지 전북여성장애인연대 대표와 거기에 있는 장애인 야학 학장을 같이 7년 하다가 서울 왔어요. 그 이전에는, 수필작가가 제 본업입니다.
고래) 수필작가셨다는 사실은 저도 처음 알았어요. 작가 생활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제가 중도장애인이거든요.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류마티스라는 질병의 후유장애로 1999년쯤 장애진단을 받았어요. 참 묘한 게, 25살에 류마티스가 발병하고 급속도로 진행이 됐으니까 불편한 삶을 사는 건 마찬가진데, 장애진단을 받기 전과 후의 삶이 너무 달라졌어요. 본질은 그대론데 장애진단을 받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거죠. 장애진단을 받기 전에는 동사무소 직원이 “이건 어디어디서 해오세요,” 라고 했는데 병원에서 1급 장애진단을 받아 동사무소에 내미니까 직원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살다가 어렵고 힘들면 나를 찾아오래요. 지극히 시혜적인 거죠. 이 사람의 태도도 기분이 나쁘고, 그걸 수용해야 되는 나도, 과거에는 몸이 아픈 유영희가 살았다면 이제는 장애인 유영희가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진단을 받고 보니까 조금씩 장애인의 촉이 발달하면서 제 속에 무언가가 누적되더라고요. 원래도 저는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주의적인 친정에 불만이 참 많았고, 결혼하고도 남편은 술자리가 있으면 저에게 통보만 하면 되는데 저는 어디 나가려면 결재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정말 싫었고 충돌도 많았어요. 이 사회가 지극히 불평등하다, 왜 힘을 가진 남자들이 이 많은 집안일에 방관자인가 생각하게 됐어요. 몸이 아프고 장애를 얻은 상태에서 육아를 해야 하는데 여전히 남성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여성임으로 인해 받는 불평등, 장애로 인해 받는 불평등이 중첩됐어요. 나는 이 아픈 몸으로 해준 밥 먹기도 힘든데 이 남자는 돈 좀 번다는 이유로 해준 밥만 먹고는 수저 딱 놓고 방에 들어가서 자기 체력을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거예요. 저는 서있기도 힘드니까 싱크대 한쪽에 기대어 설거지를 하면서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싶었죠. 그렇다고 남편 시키면 시어머니가 사내구실 못하게 한다 그러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니까 가슴에 한으로 남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풀어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틀린 몸이 아닌 다른 몸
그러다 2003년 대한민국 장애인문학상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제목은 ‘나도 한때는.’ 그 글을 쓰게 된 건 TV에서 본 인터뷰 때문이었어요. 서울시내 주택지에 아동장애인시설을 세우려고 하는데 동네사람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반대하는 거예요. 방송에서 시설에 반대하는 이유를 묻자 그 사람 대답이, “장애인과 함께 사느니 차라리 축사를 들여놓고 사는 게 낫다.” 그 인터뷰를 보며 모자이크 처리된 그 사람을 향해, 네 새끼가 꼭 나처럼 되라고 외쳤어요. 장애인 인권의 현주소를 본 거죠. 너무 충격이었고 며칠 동안을 고민했어요. 나는 이들에게, 가족들에게 뭘까. 혹시 축사만도 못한 존재를 버리지 못해 사는 거 아닐까. 나와 더불어 있는 모든 구성원 중 아무도 1급 장애를 가진 사람과 동거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장애인 가족구성원이 됐잖아요. 고민 끝에 남편한테 물어봤어요. 마누라가 장애인인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러니까 남편이 뭐, 그게 어쨌다고? 라고 하더라고요. 이 내용을 글로 써서 발표한 거였어요. 비장애인들한테 너희들의 몸이 우리와 다르지만 틀린 게 아니기에 다른 것 가지고 우월심 가지지 말라는 거였죠. 나도 한때는 배구선수, 테니스선수를 할 만큼 건강에 자신 있었고 학창시절 조직을 꾸릴 만큼 나름 리더로 살아왔는데, 살다보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날 장애인이 되어 있더라. 너희 가족 구성원 중에 누가 어느 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일지 모른다는 거죠.
여성운동을 하게 된 계기, ‘글’
이 내용으로 쓴 글이 생각지도 못하게 큰 상을 받게 되고 그게 계기가 돼서 2006년 전북여성장애인연대에서 여성장애인 글짓기 강사를 맡았어요. 강의를 해보니 잘 살고 못 살고가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 제가 물어봤어요, 살면서 한 번이라도 치마를 입어 본 적이 있느냐고.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입어보지 못했더라고요. 일찍 장애를 갖고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자기의 다른 몸을 드러내는 게 창피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왜 그게 창피해야 되죠? 왜. 그래서 다음 주에는 치마를 주제로 글을 쓰기로 하고 모두 치마를 입고 오라고 주문했어요. 다음 시간에, 그분들이 집에 보유하고 있는 치마가 한 벌도 없어서 치마를 사 입고 오셨더라고요. 우리는 틀린 몸이 아니고 다른 몸인데 왜 한 번도 치마를 입어볼 수 없었을까. 왜 우리라는 존재는 이렇게 사회로부터 분리돼야 하지? 답은 없었지만 이 질문들로 제 속에서 여성장애인인권운동에 싹이 자라고 있었어요. 만약 내가 장애를 입지 않았다면 여성운동을 했으면 딱인데, 이런 생각을 해요. 장애운동을 하다보면 너무나 비참할 때가 정말 많아요. 여성장애인은 분명히 여성인데 여성가족부에선 너네 장애인이니까 보건복지부 가라 그러고, 어떤 사업이 있을 때마다 늘 핑퐁 취급당하고. 오늘도 빛을 뚫고 여성가족부를 찾아가는데 이 길 끝에 과연 빛일까 어둠일까 싶더라고요. 이 빛이 밝아지는 빛인지 저물어가는 빛인지. 그 암담함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혜진)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글 쓰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제가 수필 공부를 하고 3개월 만에 수필과 비평이라는 수필전문지에서 신인상을 받게 됐거든요. 제 작품이 선정된 것에 저도 놀라고 가족들도 놀랐죠. 대놓고 차별은 없지만 남편이나 시어머니 의식 속에 저는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 되는, 뭔가를 하려면 결재 받아야 되는 여성장애인이었던 거죠. 그런데 남편이 볼 때도 이 사람의 우울감이 너무 깊어서 건져줘야겠으니 글이라도 쓰라고 해서 보낸 거였어요. 그런데 시작하고 몇 개월 만에 신인상을 수상한데 이어 남들은 평생 걸쳐 받을 상들이 등단하고 불과 일 년 만에 쏟아졌어요. 남편은 제가 상도 받아오고 공중파 방송에서 취재도 나오고 하니까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모임에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어요. 나가서 남자들이랑 술을 마셔야 글이 써지는 거냐고도 했죠. 하루는 제가 수상도 했으니 저희 교수님과 식사라도 해야 되지 않겠냐 해서 남편과 함께 식사자리를 마련했는데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모든 여성 작가들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이 여성작가는 수필계의 거목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마치 별똥별처럼 사라진다는 거예요. 사라진 뒤를 캐보면 결국 가정이란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편에게 당부하기를, 네 아내를 구속하지 말고 풀어놔봐라, 풀어놓으면 훗날 한국 문단을 좌지우지할 거목이 돼있을 거라고요. 한마디로 제 편을 들어준 거지요. 남편이 이 얘기를 나름 수용하더라고요. 제가 일 년 정도를 안 가도 되는 세미나까지 다 다녔어요. 제가 어딜 간다고 하면 남편 온도가 달라지지만, 그것 때문에 안가기 시작하면 다음번에도 번번이 문을 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교에서 하는 모임은 남편과 동행하기도 했는데 가보면 재미가 없거든. 그러니 다음부터는 혼자 가라고 하더라고요. 언제부턴가는 시어머니도 “야가 겁나게 잘나가는가보다”라면서 남편한테 얘 어디 가는 거 말리지 말라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이제는 누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거죠. 지금은 남편이 살림을 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챙겨주고 머리도 감겨주고요.
혜진) 변화를 이끌어내셨네요.
제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부분은 제 것을 내줬거든요. 저희 시어머니가 당뇨합병증에 고혈압, 퇴행성관절염이 겹치면서 7년을 하체를 못 쓰고 사셨어요. 그런데 저는 바닥에 앉고 서지를 못해요. 누가 일으켜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해요. 반대로 어머니는 설 수가 없잖아요. 서로 눈높이를 맞추기 힘든 거죠. 결국 시누들이 올케가 어머니를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가족회의를 열었는데 시어머니 평생에 마지막 소원이 며느리인 저랑 살고 싶다는 거예요. 시누들이 말려도 보고 자기랑 같이 살자고 해도 소용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소변만 어머니가 해결하면 모시고 살겠다고 했어요. 해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으니까. 효도는 못하지만 모시고는 살겠다고요. 그 동거를 7년간 했어요. 싸우기도 하고 후회한 적도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남편이 변하더라고요. 어머니 돌아가신 여름에 교사인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면서 당신이 자기 인생을 살도록 내가 돕겠다고 나섰어요. 그러면서부터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가사노동을 책임지더라고요.
고래) 7년이라는 시간이 저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제 친구는 저에게 “너는 여성장애인운동을 한다면서 가정에서는 장애학대를 받고 있느냐”고 하기도 했지만, 저는 단 하나였어요. 여성대여성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어요.
고래)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이었나요?
지역에서 장애인 야학 교사를 할 때, 어릴 때 안고 있다 놓쳐서 척추측만증을 앓게 된 여성장애인이 있었어요. 이란성 쌍둥이로 한날한시에 태어난 오빠는 4년제 대학까지 다 보냈는데 이 딸은 초등학교도 안 보냈어요. 사연 하나하나가 드라마, 한 편의 대하소설이예요. 작년에는 70가까운 노인 여성장애인이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는데 그날 저녁에 싱글벙글해서 학교에 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누구한테 연락했냐고 물어봤어요. 누구였을 것 같아요?
혜진) 자식?
며느리한테 했데요. 아들도 있고 남편도 있는데 왜 며느리일까, 같은 여성으로서 늘 상대적 열등감에 젖어 산거죠. 조그만 일에도 내가 못 배워서 며느리가 무시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어떤 말을 하고 싶어도 초등학교도 못나온 내가 고등교육을 마친 며느리한테 무슨? 이렇게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며느리한테 “나 합격했다, 중학교 검정고시도 볼 거다.”라고 가장 먼저 얘기하고 그 후에 남편한테 연락했대요. 
또 한 번은 제가 지역에 있으면서 여성장애인 합창단을 만들었거든요. 거기에 서른 살 초반인 중증 뇌병변 여성장애인이 있었는데 합창단 입단하기 전까지 휠체어를 타고 나오면 늘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자기를 쳐다본다고. 합창단 들어와서 전북도청 공연을 앞두고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연습하는 데 지휘자가 앞 소절을 솔로로 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농담 삼아 그 친구한테 너랑 나랑 할까? 하고 물어보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거예요. 결국 공연당일 도청소속 공무원 몇 백 명 앞에서 그 친구랑 제가 솔로를 주고받으며 했지요. 그때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더라고요.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나 여기 있어요” 외쳐본 적이 없는 친구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노래를 다 불러내는 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거잖아요. 중증 장애인이지만 도청 공무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잖아요. 이 사람이 사회적 인간으로서 누군가한테 받는 게 아니라 주고 있다는 것. 뭉클했던 그 기억이 잊히지 않아요.
고래) 요즘도 글을 쓰세요?
못쓰고 있어요.
고래) 많이 바쁘시죠?
바쁘기 보단, 핑곈데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불평등이나 부조리가 예전에는 저 혼자 겪는 개인적인 일이었다면 지금은 여성장애인 전체가 겪는 짐이 제 속에 있다 보니. 축적된 분노가 내제되어 있어서 글로 쓰려고 시도하면 인생을 관조하는 얘기로 가지 않고 계속 회의가 드는 거예요. 백년이 지난다고 바뀔까싶은. 어젯밤도 제 안에 글감들이 있어서 나를 힐링하는 글을 써볼까 하고 앉았어요. 시각장애여성이 저에게 가방을 짜준 일이 있었거든요. 저조차도 시각장애인에 대한 한계를 규정지은 것들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써보려고 앉았어요. 그러면서 헌법 제10조를 적어보는데 마음과 머리가 다른 거예요. 마음은 미담 사례를 하고 싶은데 머리는 내가 이 나라 국민 맞아? 라는 생각과 분노가 치밀면서 글로 풀지를 못하겠는 거예요. 결국 헌법 제10조만 쓰고 컴퓨터를 닫았어요,
혜진) 분노를 담아보는 글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분노를 담아두는 것보다 표출하는 게 이롭지 않을까요?
저는 분노를 감춰놓지요. 예전에 제가 블로그 활동을 활발히 했는데 알고 보니 제가 서울에 올라온 뒤로 경찰에서 제 블로그까지 다 보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제 아들이 군인이거든요. 아들도 나름의 목적과 꿈이 있는데 아들입장에서는 엄마가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거죠. 글은 활자화 되고 발표가 되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손을 통해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지금은 직설적인 글은 잘 쓰지도 않고 쓰더라도 하드 대신 USB에 저장하고요. 아들이나 제가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젊은 사람이 자기 앞길을 위해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고래)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드심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고 계신 힘은 어디서 나오시는지요.
근원적인 힘은 우리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소속회원 5천명의 힘이죠. 또 하나는 손자들.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 내가 떠나고라도 저 아이들의 웃음이 말라지지 않게끔 만들고 싶어요. 그런 세상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하고 있잖아요.
아들이고 딸이고, 장애가 있고 없고를 떠나 아이들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평범한 그 말이 어느 때보다 가슴 저리게 다가오는 시대이다. 아이들이 웃을 수 없는 세상, 수필작가가 글을 쓸 수 없는 세상은 그러나, 변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그 한 걸음이 있어야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의 허스토리(herstory)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땅에서 가장 차별받고 소외된 여성장애인들이 당당한 권리를 찾고 누리며 평등 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조직한 여성장애인 인권운동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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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성연합의 '온콘' '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은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시즌1을 마감합니다.
우리 사회 통념을 바꾸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을 만들어가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2015년 '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 시즌2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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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 : 유영희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
인터뷰어 : 혜진, 고래
기사 작성 : 고래
사진 촬영 : 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