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10년만의 화려한 외출

여성연합 2002.01.07 조회 수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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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외출중이다. 그것도 아주 화려한 외출을 하고 있다. 나의 외출이 화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외출하기가 무척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외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올해 1월부터 1년이라는 안식년을 받아 상담소로부터의 외출을 하고 있다. 1993년부터 상근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8년만의 외출이고, 91년부터 자원활동을 시작했으니까 상담소에 발을 디딘 지 10년만의 외출이다. 그러니까 화려할 수 밖에......

이쯤이면 많은 사람들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무척 긴 1년이라는 안식년을 받은, 그렇게 화려한 외출을 한 사람이 과연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첫 번째, 세상의 건너편을 보고 두 번째,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고 세 번째, 사소하지만 깊은 나의 내면을 보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엥? 무척이나 애매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단체에서 안식월 혹은 안식년 제도를 도입한 목적에 충실하게 자기개발과 재충전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대답이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4개월간의 나의 외출은 바로 세상과 사람과 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혹은 생각해 보게 하는 하루하루였다.

대부분의 여성운동가들이 그렇겠지만 외출전의 난, 상담소가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삶을 살았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이 두 가지 목표와 관련된 사람과 장소 그리고 상담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담소가 일상적인 생활무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을 많이 떠나와서 생활하고 있다. 여성운동을 더 잘해보겠다고 시작한 대학원에 복학해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고, 여성운동을 하느라고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 학교 선후배, 그리고 사조직이라고 표현했던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관련 모든 소식을 단체 내에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한 발 떨어져서 제3자 혹은 매스컴과 사이버 세상을 통해서 듣고 있다.

삶의 터전이 180도 확 바뀌어 버린 것이다. 또 삶의 방식도 잘못된 무엇인가를 바꾸기 위해서 때론 진보주의자로, 때론 계몽주의자로, 때론 저돌적인 싸움닭으로, 때론 포용력 있는 상담가로 살던 삶에서 이제는 무엇인가를 배우는 학생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적극적인 경청가로, 시간을 전부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백수로,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부분에선 지진아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난 여성운동 건너편의 세상을 보고, 여성운동 건너편의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여성운동을 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다. 성폭력 관련 여성운동 10년..... 제도적으로 성폭력 특별법의 제정, 남녀차별금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에 직장내 성희롱 금지조항 제정 및 신설,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의 승소, 일반 대중들의 성폭력에 관한 인식변화, 문화의 변화 등등 정말 많은 일들을 했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난 현실적 기반 이상의 인식의 변화를 기대해 왔나보다. 아직 여성운동 건너편의 세상에 할 일이 잔뜩 쌓여 있고 다른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주전 여성복지론 수업에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논의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학생이 자신은 페미니스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의 생각에 페미니스트는 드세고 무조건 자신의 주장만 관철시키려고 해서 문제를 만들고 특히 남녀관계를 대립관계로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고 그래서 자신은 페미니스트로 살고 싶지 않고 행복한 가정에 만족하고 양보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는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사람..... "그럼 나잖아...."라는데 생각이 미치는 순간, 그녀의 생각이 왜 잘못됐는지를 입에 거품을 물고 얘기했다. 물론 수업의 결론은 여성의 실존이 페미니스트일 수밖에 없다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몇 명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수업이 끝나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입에 거품 물고 얘기했다고 그녀의 기본적인 생각이 바뀌었을까? 물론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더 강화시켰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서 옳다고 하더라도 전달하는 방법론에 따라 변화 가능성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성급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수준이고 사소한 사건일 수도 있지만 아직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실존이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누구도 페미니스트를 강요할 수 없는 문제이다. 상담소를 떠나서 살면서 이런 문제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상담소에 있을 때에는 일에 몰입되어 변화되어야 할 문제는 당위성이라는 오직 한 가지 믿음으로 계몽적으로 달려들었던 경우가 참 많았다.

이제 한 걸음 물러서서 다양성의 수용과 사람에 대한 이해 그리고 접근 방법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어야 진정한 여성운동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 변혁을 꿈꾸고 대중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지 계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얘길 하다보니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는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한 것 같다. 어쨌든 난 요즘 실무에서 벗어나 세상과 패러다임과 이론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전반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특히 요사이는 길을 걸을 때 풀과 나무를 보면서, 바람을 스치면서, 비를 맞으며 봄과 여름을 느끼고 있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학교 교정에 핀 여러 종류의 꽃들을 보면서 행복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연이 주는 거칠 것 없는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하면서..... 늘상 지하철에서 에어콘을 틀면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이고, 에어콘이 꺼지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이구나 하던 메말랐던 정서가 풍요로워지고 있다.

정서가 풍요로워지면서 좋은 점은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높이가 여유로워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유로움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다. 다시 일을 하게 되면 망중한이라는 단어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살고 싶다. 이제껏 나에게 망중한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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