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261번 배번호의 그녀
여기, 한 여성이 있다.
남성들에게 제지당하는 순간에도 묵묵히 내리 깐 눈, 꼭 다문 입술로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단발머리 그녀. ‘여성에게 금지된 스포츠, 마라톤’에 대한 도전, 42.195km 완주를 목전에 두고 대회 관계자들에게 붙잡혀 제지당하는 그녀, 스무 살의 캐서린이다.
261번, 그녀의 배번호표를 빼앗으려는 이 한 장의 사진은 196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의 한 장면이다. 그간 여성들에게 ‘금지’되었던 마라톤대회 출전을 ‘논의’하게 한 결정적 순간을 담은 사진이다.
과연, 261번 그녀는 골인지점을 통과해 완주했을까?
1896년 근대올림픽의 부활과 더불어 여성 러너들의 마라톤 도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1967년 위 사진이 말해주듯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공식 마라톤 대회에서 처음 완주한 여성은 멜포메네라는 여성이다. 1896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멜포메네가 조직위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공식 참가하였다. 즉, 정식 배번호표를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멜포메네는 42.195km를 달려 경기장에 도착했지만 남성 진행요원들의 저지로 인해 피니시 라인을 통과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골인지점까지 남은 트랙 대신 경기장 밖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4시간 30분 만에 레이스를 마쳤다.
이후 여성들의 마라톤 도전은 숨어서 출발하고, 변장하고, 남성 이름으로 바꿔 대회신청을 하는 등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였다. 출전하고도 달리는 길에서 제지당해 여성들의 반발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던 시대에, 질주하는 캐서린을 제지하는 이 한 장의 사진은 여성마라톤역사의 물꼬를 트는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after 46 years
2013년, 73246번 배번호의 그녀
결론적으로 캐서린은 완주에 성공했다.
앞서 달린 여성들과 캐서린, 여전히 여성에게 금지된 마라톤에 대한 도전과 용기의 크기는 차이가 없었을 텐데, 왜 그녀들은 못했고, 캐서린은 할 수 있었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 사진에선 보이지 않는 ‘조력자’의 있고 없음이 아닐까. 다수의 남성 관계자들이 번호표를 빼앗으려 달려들면, 그녀들은 힘으로 이겨낼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캐서린은 완주에 성공했다. 당시 캐서린과 함께 레이스에 동행한 코치 어니 브릭스와 연인 톰 밀러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식참가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풀코스 완주기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완주와 이 사진은 여성마라톤역사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사진의 흔적조차 없는 수많은 그녀들이 그리도 달리고 싶어 했던 42.195km의 그 길.
그녀들의 도전과 용기도 코끝이 찡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도 그 길을 평등하게 달리고 싶다..’라는 캐서린의 ‘도전과 용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격려해주며 그 길을 동행해 준 용기 있는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금녀의 벽, 마라톤’이 여성에게 열렸을까 생각해보게 하는 한 장의 사진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는 스포츠에 여성이 참여한다는 것을 신성에 대한 침해로 여겼고, 관전의 기회마저 허용하지 않는 시대도 있었다.
지금처럼 세계 어느 마라톤대회나 여성 참가가 ‘당연히’ 허용되는 환경이 만들어지기까지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가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도화된 현재의 마라톤 환경에서 여성 러너들은 당당하고, 즐겁게 스스로 선택한 그 길을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after 46 years
2059년, 00000번 배번호의 그녀
꽁꽁 언 겨울 땅을 뚫고 태어난 푸르른 봄동처럼 뼛 속 깊이 시대의 한기가 들던 1987년 태어난 ‘여성연합’이 올해로 어느덧 스물 여섯 청년이 되었다.
여성인권 3법(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방지법), 일가정양립을 위한 법제도마련, 호주제폐지운동, 3․8세계여성의 날 개최 등 대한민국 여성운동의 길은 그녀만의 Herstory가 아니다. 이것은 나와 여러분 그리고 대한민국의 Ourstory다.
10월 31일, 여성연합 창립26주년 ‘동행, 10월의 어느 멋진 날’ 후원잔치가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개최된다. 여성연합을 움직이게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신발끈 단디 조여매고 다시 용기 내어 달릴 수 있도록 묵묵히 곁을 동행해주신 후원자님들을 모시고 따뜻한 후원잔치를 개최한다. 여성연합이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운동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는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26년 훨씬 그 이전 시대를 거슬러 올라 수많은 여성들의 도전과 용기, 조력자들의 동행으로 쌓이고 쌓인 시대의 요청이다.
2013년 10월의 어느 멋진 날의 동행으로 다시 46년 뒤 2059년 또 다른 캐서린이 더욱 힘차게 건강하게 함께 ‘성평등의 마라톤’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 글을 마친다.
글 : 리연(한국여성단체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