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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남편을 일으키는 금순  ⓒ 
우선 영화를 보는 당신들에게 '왜 영화를 보는가?'란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한다. 가장 늦게 예술의 영역으로 침범한 영상장르의 매혹 앞에 우리의 몰입과 탄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여주며 우리의 맞받아치기는 어떠한 모습인가.

일련의 우리 영화들을 지켜보면 몇 가지 강박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코믹장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소위 '웃겨야 된다'는 적나라한 상업성에의 집착.
둘째,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는' 엄청난 제작비의 무모한 감수가 그것이다.(이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대한 논란은 한바탕 우리 영화판을 흔들어 놓았다)

셋째, 제작의 졸속성과 스타의존성.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주제의 문제)보다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소재의 문제)에 경도된 시작의 결말은 뻔하다. '되는 배우'를 찾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 '되는 배우'들이란 연기로서의 거듭남을 거세(당)한 '예쁜 이미지'의 화신들이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시놉시스는 간단하다. 전 국가대표 배구선수였던 전금순(배두나 분)은 어깨부상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녀의 열혈팬이었던 한준태(김태우 분)를 만나 결혼한다.

살림에 관한 한 '난 아무 것도 몰라요'인 아줌마 전금순은 무섭디 무서운 시부모님의 방문을 준비하느라 우왕좌왕. 첫 출근한 남편에게 고등어를 부탁하고 깜빡 잠이 든다. 그러다 받는 전화 한 통. "네 남편 데려가!"

2.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가 표명하고 있는 지점은 남편을 구출하는 열혈 아줌마로서의 강한 이미지다. 그 이미지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살림에 무능한지, 얼마나 애보기에 애를 먹는지, 제 나이 수준을 밑도는 순진성을 죽 나열해 보여준다.

배두나의 페르소나는 충실히 플롯을 따라가며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배두나식 '아줌마'는 없었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제3의 성이라고 희화되는 '아줌마'의 정체성은 그저 에스프리일 뿐이다.

그녀는 남편을 구출하기 위해 사방팔방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아이를 잃고 조폭들과 맞선다. 시퀀스마다 웃음을 조장하는 효과음들과 빠른 패닝, 난데없는 조연들의 출연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들이다. 나는 이 영화가 아줌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아저씨'들보다 열등한 종으로 치부되는 아줌마로서의 정체성을 기대했을 뿐이다.

▲ 전화하는 금순  ⓒ 
배두나는 연기한다. 무엇을? '배두나'를. 배두나 아줌마는 얼띠고 순진하지만, 남편을 위해서라면 '위대한 손바닥'이 내뿜는 강스파이크를 휘두를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뿐이다. 그러니 '다 죽기' 싫으면 순순히 남편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시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3.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영화는 단연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노선을 지향한다. 이런 부분에서 영화는 또 다른 의미의 공해와 정화기능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경계에는 여타의 예술 장르가 그러하듯 '창조성'의 유무가 놓여 있다. 창조성이란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해석에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밖으로는 '아줌마' 정서를 표방하지만 알맹이는 지난한 하루의 에피소드를 나열하기에 급급해 보인다.

우리는 애써 웃음으로 그 모험에 화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자막이 올라갈 때 남겨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 그것뿐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두 시간 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

웃음이 남았다고? 그렇다면 다행이다. 문제는 다시 '왜 영화를 보는가'이다. 그 해답과 선택은 당연히 우리의 몫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그런 선택의 문제를 다시 생각케 한다는 부분에서 긍정적이다. 단지 '굳센' 머리로 들이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박인자 기자 rarisa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