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 평화


▲ 24일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17대 여성국회의원 당선자와 여성단체는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라크파병 원점 재검토`를 촉구했다. 정현백 여성연합 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2004 오마이뉴스 이종호

"새벽에 깨어나 위성방송을 봤어요. (미군이 이라크 포로의) 옷을 홀랑 벗겨 조롱하는 것을 봤습니다. 참 기가 막혔어요. 나도 열네살에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그때 나는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준 고쟁이 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일본군은 내가 그 고쟁이를 안 벗는다고 칼로 찢었어요. 지금 이라크 여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왜 우리 젊은이들이 그런 전쟁에 가야합니까? 파병하려거든, 대통령과 국회의원 자식들부터 보내요!"

김윤심(76세) 할머니는 울부짖었다. 가슴속에서 불기둥이 솟은 것일까. 김 할머니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씩이나 마이크를 집어던졌다. 진행요원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한동안 일어서서 고함을 외쳤고, 이내 주저앉아 흰 손수건에 눈물을 꾹꾹 찍기도 했다.

김 할머니가 이렇게 분노한 이유는 인간성을 상실한 비열한 전쟁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소녀시절, 이유도 모르는 전쟁에 끌려갔다가 평생동안 사람취급 한번 못받고 살았다"며 "성노예로 희생당해 자식 하나 못 낳아보고 사는 여자의 심정을 아느냐"고 말했다.

김 할머니가 우연히 TV를 통해 목격한 이라크포로 성학대 화면은 진저리쳐지는 50년 전 자신의 경험과 닮아있었다. 김 할머니는 50년 전 자신의 삶에서 체득한 추악한 전쟁의 일단을 알리고, 젊은이들의 파병을 막고자 기자회견 장에 섰다.

"대통령과 의원 자식부터 보내라" 일본군성노예 피해 할머니의 외침
▲ 심상정 민주노동당 당선자가 파병반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 2004 오마이뉴스 이종호

전국 51개 여성단체와 17대 국회 여성당선자 15명은 '5·24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여성의 날'인 오늘(24일) 오전 11시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이라크파병 원점 재검토'를 위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여성당선자들은 평화호소문을 발표하고, "개원 즉시 국회 안에서 이라크파병 원점 재검토를 위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지금은 파병을 강행할 때가 아니라 보다 신중하게 상황을 살피고 국민과 논의할 때"라며 "우리는 한국정부가 이라크 평화와 재건을 위한 진정한 방안을 강구하고, 이라크 파병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에 각각 서명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장향숙 열린우리당 당선자는 "내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이유는 내 몸이 대신 말해준다"며 "전쟁은 장애를 낳고, 병을 발생시키며,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고 주장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당선자는 "부시의 이라크전쟁 명분은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졌다"며 "17대 국회가 개원하면 여성의원, 시민단체들과 함께 이라크파병철회 촉구를 위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손봉숙 민주당 당선자는 "국회의원이 돼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이라크 파병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전파시키고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조건부 파병이어야 하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완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승희 열린우리당 당선자는 "평화를 지향하고 침략전쟁에 가지 않는 게 우리 헌법정신"이라며 "이라크 주권이양시기인 6월말 이라크 현지조사와 실태파악을 위한 국회 차원의 TF팀 구성을 제안한다"고 주장했다.

현애자 민주노동당 당선자는 "미군에 의한 인권살상이 극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라며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는 17대 국회에서 여성들이 초당적 차원에서 선두에 섰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여성들이 초당적 차원에서 선두에 섰다"

정현백 여성연합 상임대표는 "국회도 개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17대 여성당선자 15명이 용기 있는 결단을 발휘했다"며 "이런 여성당선자들의 활동은 평화운동과 맑은 정치를 실현하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여성계를 대표해 발언에 나선 임영신 이라크평화네트워크 활동가는 "16대 국회에서 이라크파병을 결정하면서 주장했던 것은 부국강병론과 한미동맹론이었다"며 "그러나 우리 현실에는 고려할 게 미국과 한미동맹론 밖에 없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임씨는 "지금 이라크 팔루자에서는 도망가는 아이를 죽이는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며 "이라크평화네트워크는 이라크 현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으고 숫자를 집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팔루자학살, 포로 성고문에서 드러나는 미군의 이라크점령 실상을 여성의 눈으로 보고 고발할 것"이라며 "이 내용이야말로 이라크파병을 반대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 몇몇 당선자들이 '평화유지군 성격의 조건부 파병'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정현백 여성연합 상임대표는 "지금 평화유지군을 논의할 단계가 아니"라며 "현재로서는 완전 재검토돼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날 평화호소문에 서명한 17대 여성당선자는 열린우리당 강혜숙·김선미·김희선·윤원호·이경숙·이은영·유승희·장향숙·홍미영, 민주노동당 심상정·이영순·최순영·현애자, 민주당 손봉숙·이승희 당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