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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리는 선녀였다. 하늘나라에서 지상의 아름다운 숲속, 맑은 물가로 친구들과 어울려 목욕 하러 내려오는 선녀의 마음만큼 우리는 행복했고 설레였다. 목욕탕 이름도 세심천.

"그래, 마음을 씻는 거야. 행복하기 위하여 여성운동을 한다고 나섰건만 어느 사이엔가 일에 치여 그야말로 심신의 피로 상태에 젖어 있었잖아. 옆의 동료의 어려움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마음에 때가 많이 끼었어. 그래, 마음을 씻는 거야"

우리 일곱 여자는 일곱빛깔 무지개처럼 줄지어 목욕탕에 들어섰다. 드디어, 한 달 동안 벼르고 벼르던 '단결과 친목의 시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여자가 옷장 열쇠를 받기위해 카우터에 다가서는 순간, 이상한 삐삐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게 아닌가.

"손님 가방 속에 뭐가 들어있는 모양이네요"
열쇠를 나눠주는 40대 여자의 퉁명스런 목소리

그제서야 우리는 카운터 옆에 이상한 물체가 서 있음을 보았다. 대형 매장이나 공항 같은 곳에서 보았던 사각 문틀, 대통령이 참석한다는 어느 행사장에서 경호상의 이유라며 그 문틀을 통과하게 한 기억이 있는 '기분 나쁜' 물건이었다. 그 문틀 위에 잠자리 눈처럼 붙어 있는 붉은 경광등이 우리 다섯째 선녀가 지나는 순간 빽빽 울어댄 것이었다.

"아니, 이런 게 왜 필요하죠? 다 벗으려고 들어온 목욕탕에"
우리의 의문에는 아랑곳없이 그들은 다시 한번 그 문 옆을 지나보라고 했다. 역시 울음소리가 또 났다.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 소리가 자꾸 나는 거죠?"
"손님 가방에 뭔가 이상한 게 들어있으니까 그런 소리가 나는 거예요"
"이상한 거 없어요"
"없는데 왜 그런 소리가 나요. 있으니까 나는 거지"

카운터의 두 여자는 가방이라도 뒤질 기세였다.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
"이거 기분 나빠서 목욕하겠어요? 목욕탕에 이런 물건이 왜 있어야 하는 거죠?"

여럿이 우루루 나서서 항의를 하자 기세가 다소 꺽이는 듯 하더니 어딘가에서 바코드가 찍힌 물건을 하나 꺼내더니 내보이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손님 가방에 이런 게 붙어있는데 제대로 찍히지 않은 게 있는 거예요. 우리는 다른 데 가서 망신 당할까봐 알려드리는 것 뿐이예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라고 감탄하지 않으면 안될 듯한 당당한 공치사.
그 때 또다시 삑삑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 돌아보니 발가벗은 두 꼬마가 그 문 옆을 지나고 있었다.

"저것 보세요. 그냥 울리잖아요. 고장난 거 아녜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이들은 계속 그 옆으로 뛰어다니고 소리 역시 계속 나는 데도 두 여자는 완고했다. 목욕탕에는 여러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우리의 이 '저항'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도 칠선녀가 아니라 혼자였다면 끽소리 못하고 기분 나쁜 채 물에 텀벙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이런 상처를 안고 지나간 여자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단결된 여성들의 항의가 없었기에 그 문틀은 시뻘건 눈을 치뜨고 오늘도 건재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리고 우리를 태우고 갈 승합차 운전기사 아저씨도 이미 남탕으로 들어가 버린 뒤이고 보니 마음은 이미 버렸고 '세신'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그냥 입장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런데!! 지상에 핀 악의 꽃들은 우리 선녀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어! 자물쇠가 안 듣는다"

서너명이 돌아가며 돌렸어도 옷장문 하나가 잠기지 않았다. 제 옷장 문은 다 쉽게 잠근 사람들이 덤볐으니 사용법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터. 종업원을 불렀다. 그이는 무안할 정도로 단숨에 문을 잠갔다. 그러나 정작 무안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고장은 무슨 고장이야!"

그는 점령군처럼 뻣뻣한 자세로 상대가 열쇠를 받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열쇠를 놓아버렸다. 열쇠는 바닥에 떨어졌다. 기막혀 하는 우리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는 문이 고장났다고 신고한 할머니에게 향했다.

쇳대가 말을 듣지 않아 관광버스 일행과 떨어진 그 할머니는 조바심을 냈다.
"조르지 좀 마세요. 이 사람을 해주고 나야 갈 수 있잖아요"

조바심에 졸고 야단까지 맞은 할머니는 아무 말도 못했다. 비록 결과적으로 종업원이 잠갔다 할지라도 여러사람이 돌아가며 해봤는데도 잠기지 않은 문이라면 이건 고장으로 판단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사과는커녕 '마땅히 제가 할 일을 나를 불러 시키냐'는 투의 태도는 분명 횡포였다.

'아이구, 저걸 그냥!!' 눈빛으로만 마음을 확인하고 하고 우리는 그냥 입탕했다. 더 이상 기분을 상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람이야 어쨌든 노천탕은 즐거웠다. 우리 일곱 선녀들에게 꼭 맞는 크기이며 물의 온도와 분위기도 그랬다. 이방 저방 옮겨다니며 찜질도 하고 우리보다 먼저 내려온 웅녀가 발랐다는 쑥팩도 하고 줄줄이 앉아 등을 밀어주는 자매애도 과시하다보니, 세신과 더불어 약간의 세심도 되는 듯했다.

"그만 나가자. 기사 아저씨는 벌써 나왔을 꺼야. 남자들은 금방 하잖아"
서둘러 나온 순간, 이번에는 황당!!!

수건 판매 : 값 천 원

"동네도 아니고, 관광지의 목욕탕에서 수건을 써비스로 빌려주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최소한 백원 내고 빌려쓰는 수건이라도 있어야지"
"완전히 수건 장사까지 하겠다는 거로구만"

다행히 일행 중 한 명이 수건을 넣어왔기에 오기로 그 수건을 짜고 또 짜서 일곱의 몸을 다 닦아냈다.

기사아저씨는 우리 보다 조금 늦게 나왔다. 맨손으로 들어갔다 맨손으로 나오는 아저씨에게 수건을 물어보았다.
"목욕탕에 들어가니까 산더미 처럼 쌓아놓고 맘대로 쓰게 하더구만"

검색대에 대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목욕탕에 그런 게 왜 있어. 아무 것도 없었다구"

차별이었음을 아는 순간 더 기가 막혔다.
점심은 그 근처에 있는 일행 중 한 명의 친정집에서 먹게 되었다.

"어때? 세심천 물 좋지?"
그 친정어머니는 그 목욕탕을 애용하는 모양이었다. 여탕에는 공짜 수건이 없더라는 말에 담담하게 말씀하시길. "여자들이 수건을 가지고 가서 그런다는구나"

"그러면 아예 옷장 열쇠를 줄 때 수건을 주고 열쇠 반납할 때 수건도 반납하게 하면 되잖아요"

"그러게. 그런데 또 여자들은 수건을 남자들보다 많이 쓰니까. 머리두 말려야 하구"

"그러면 그건 돈 주고 빌려쓰던지 사서 쓰던지 하게 하면 되잖아요"

"글세, 그러면 되겠네"

이처럼, 여지껏 수많은 여성들이 수건의 남녀차별이유를 여성의 절도습관과 낭비성으로 들 때 그대로 수긍하고 참아넘긴 것이었다. 여자들의 자존심이라는 게 얼마나 맥이 없는지. 하긴 여성의 집단적 자존심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건 가져갈 까봐 검색대를 설치해요. 그건 너무 심해"
이제 이야기가 검색대로 번지자 그 친정아버지가 깜짝 놀라셨다.

"아니, 그런 인권침해가! 언제부터 목욕탕에 그런 게 있었다더냐. 그걸 여자들이 여태껏 그냥 놔뒀단 말이야. 말도 안 돼. 남자목욕탕에 그게 있었어봐라. 나라도 당장 뒤집어버리지"

그 아버지의 말씀에 이번에는 우리가 깜짝 놀랐다.
"뒤집어 버려도 되는 거였단 말야. 그런데 우리는 바보같이 그냥 속만 끓이다 나왔잖아"

둥그렇게 뜬 칠선녀의 눈에 똑같은 생각이 떠있었다.
"세심천 사장에게 항의하자"
"목욕업 중앙회 이런 곳에 말해야 하는 거 아냐"
"세심천 관할 구청에 항의하자"
"여성부에다가 목욕탕의 남녀평등 실현을 진정 넣자"

어떻게 뒤집을까, 이 궁리 저 궁리가 다 많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결의했다.
"오늘부터 인터넷에 전국 목욕탕 남녀평등 추진운동을 띄우자. 그래서 현재 차별하는 목욕탕의 명단과 차별의 양태를 파악하고, 또 차별없이 하고 있는 목욕탕의 명단과 운영방안을 들어서 대안을 제시하자"

그 결의의 첫 사업으로 나는 이 글을 쓴다. 그러므로 전국의 목욕을 즐기는 선녀들은 모두 나서라. 목욕탕 남녀평등 추진 운동에 나서자.

참을성의 끈을 싹뚝 베고 평등의 세상으로 훨훨날자. 자유롭게 목욕하러 오르락 내리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