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이 가진 마술의 손
그가 들어선다. 인사를 하고 차 한잔을 마시는가 했더니 어느 새 팔을 걷어붙이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조금 긴 상담 전화 한 통을 받고 수화기의 무게에 짓눌린 팔과 어깨를 한 번 펴고 나니 풍경이 달라져 있다. 지저분한 포장지를 걷어낸 상자처럼 사무실 공간이 반듯하고 정갈하다.
또 다른 그가 들어선다. 아이들을 맡기고 나오느라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숨 돌린다.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나보다 여겼는데 '막내 올 시간'이라며 점심도 마다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다음 보니 삼단 파일박스 안이 치열 고운 이빨처럼 가지런하다. 온갖 것들이 뒤섞여 만물상이 따로 없던 파일박스가, 그것도 세 단이나 되는 것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제 자리를 잡고 들어앉다니.
또 또 다른 그가 온다. 한 군데 전화번호를 찾으려면 몇 번이나 이리 젖히고 저리 넘겨야 하는 해묵은 주소록 보따리를 잡는다.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차 한잔의 여유조차 생략한 채 숫자의 나열에 온 정신을 쏟는다. '저, 갈게요'하며 초록색 파일을 내미는데 거기 열 손가락이 달려있다. 손가락마다 이름이 붙어있다. 운영위원 명단, 자문위원 명단, 유관단체 명단...........
도대체 이들의 머리와 손은 어떻게 구조화되었기에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복잡한 것들을 이토록 짧은 시간에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후딱 해치우는 것일까. 누가 보아도 감탄할 이 일을 놓고 그들은 영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런 일밖에 못하는 거지요."
"에이, 이건 살림하는 여자들은 누구나 다 하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아냐."
"이런 일도 상담소에 도움이 된다니 참 다행이에요. 자원봉사라고 나와 가지고 걸리적거리기만 하면 미안하잖아요."
아이들 서랍을 외면해야 하는 이유
몇 년 전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개방화 바람이 불면서 중국에서도 조기 교육 열풍이 불었다. 유치원 아이들이 이태백의 어려운 시 구절을 줄줄 외는 것은 보통이 되었다. 그 무렵 중국 신문에 걱정어린 기사가 실렸다.
"이태백과 두보의 시를 줄줄 외면서도 자기 신발의 풀어진 끈을 묶을 줄은 모른다. 이런 애들이 나중에 자라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엄마들은 어린아이들의 살림살이를 직접 정리, 관리해준다. 아이가 어려서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게 이유이다. 그러나 엄마가 이렇게 해주다 보면 아이는 아예 그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항상 엄마가 해 주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린다.
처음에 아이들은 모든 물건을 서랍 한 개에 다 몰아넣는다. 사단, 오단 서랍을 주어도 각 서랍마다 구분이 없다. 속옷과 양말과 바지가 한 서랍 속에 뒤섞여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속옷과 양말을 따로 넣는 요량이 생기고 바지도 반바지와 긴 바지를 구분해서 보관하는 수준까지 발전한다. 책상서랍 정리와 학용품 보관도 마찬가지이다. 섞여 있던 것들이 구분되면서 체계가 잡히는 것이다.
인간 두뇌의 발달은 분류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한 덩어리를 보고 그것을 세분화하는 것이 분석력이고, 세분화된 것들을 다 묶어 하나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종합력이다. 똑똑하다든지 공부를 잘 한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분석력과 종합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용품들을 나누어서 여러 서랍에 보관했다가(분석) 미술이 든 날에는 이쪽 서랍에서는 크레파스, 저쪽 서랍에서는 스케치북 등을 꺼내 화구 일습을 챙겨(종합) 간다면 학습의 기본 능력이 갖추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생활능력이 키워지면서 뇌는 학습의 기본구도를 갖추게 되고 그럴 때 배운 만큼 안 만큼 실천하면서 사회적 능력이 신장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제 물건을 정리 못해도 눈감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술의 손을 밑천으로 도전하자
아줌마가 관리해야 하는 서랍은 몇 개런가. 아무리 적어도 식구 수 곱하기 삼은 넘는다. 전담하고 있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다. 부엌만 봐도 열 칸이 넘는다. 그 뿐인가. 동시 다발적으로 이 일을 저 일을 해내야 한다. 전화 받으면서 음식 볶으며, 옆에서 말 거는 아이에게 눈짓과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은 여자들에게 그리 신기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이다.
게다가 머리 속에서는 다음에 할 일, 오늘 해야 할 일, 내일이나 이번 주 안에 들어있는 생일, 제사, 분리수거 요일, 친목계 날짜 등이 왱왱 돌아간다니! 결혼생활 연수와 자녀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마술의 손은 더욱 기적적으로 발달해 있다. 매일 매일 코앞에 닥치고 발등에 떨어져 쌓이는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마술의 손이 된 것이다.
이제 자신의 손이 마술의 손임을 깨닫자. '할 줄 아는 게 이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손'이기에 그것을 밑천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부하자.
집안 일이 사회적 일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일을 구성하는 종합판이기에, 집안 일의 달인은 사회에 세분화되어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를 '종합적'으로 닦은 셈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믿어주고 칭찬해 주자. 그 능력의 손을 이제 세상 밖으로 뻗자. 망설임이 없이, 자신 있게!
그가 들어선다. 인사를 하고 차 한잔을 마시는가 했더니 어느 새 팔을 걷어붙이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조금 긴 상담 전화 한 통을 받고 수화기의 무게에 짓눌린 팔과 어깨를 한 번 펴고 나니 풍경이 달라져 있다. 지저분한 포장지를 걷어낸 상자처럼 사무실 공간이 반듯하고 정갈하다.
또 다른 그가 들어선다. 아이들을 맡기고 나오느라 전쟁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숨 돌린다.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나보다 여겼는데 '막내 올 시간'이라며 점심도 마다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다음 보니 삼단 파일박스 안이 치열 고운 이빨처럼 가지런하다. 온갖 것들이 뒤섞여 만물상이 따로 없던 파일박스가, 그것도 세 단이나 되는 것이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제 자리를 잡고 들어앉다니.
또 또 다른 그가 온다. 한 군데 전화번호를 찾으려면 몇 번이나 이리 젖히고 저리 넘겨야 하는 해묵은 주소록 보따리를 잡는다. '오늘은 시간이 없다'며 차 한잔의 여유조차 생략한 채 숫자의 나열에 온 정신을 쏟는다. '저, 갈게요'하며 초록색 파일을 내미는데 거기 열 손가락이 달려있다. 손가락마다 이름이 붙어있다. 운영위원 명단, 자문위원 명단, 유관단체 명단...........
도대체 이들의 머리와 손은 어떻게 구조화되었기에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복잡한 것들을 이토록 짧은 시간에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후딱 해치우는 것일까. 누가 보아도 감탄할 이 일을 놓고 그들은 영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런 일밖에 못하는 거지요."
"에이, 이건 살림하는 여자들은 누구나 다 하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아냐."
"이런 일도 상담소에 도움이 된다니 참 다행이에요. 자원봉사라고 나와 가지고 걸리적거리기만 하면 미안하잖아요."
아이들 서랍을 외면해야 하는 이유
몇 년 전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개방화 바람이 불면서 중국에서도 조기 교육 열풍이 불었다. 유치원 아이들이 이태백의 어려운 시 구절을 줄줄 외는 것은 보통이 되었다. 그 무렵 중국 신문에 걱정어린 기사가 실렸다.
"이태백과 두보의 시를 줄줄 외면서도 자기 신발의 풀어진 끈을 묶을 줄은 모른다. 이런 애들이 나중에 자라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엄마들은 어린아이들의 살림살이를 직접 정리, 관리해준다. 아이가 어려서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게 이유이다. 그러나 엄마가 이렇게 해주다 보면 아이는 아예 그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항상 엄마가 해 주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린다.
처음에 아이들은 모든 물건을 서랍 한 개에 다 몰아넣는다. 사단, 오단 서랍을 주어도 각 서랍마다 구분이 없다. 속옷과 양말과 바지가 한 서랍 속에 뒤섞여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속옷과 양말을 따로 넣는 요량이 생기고 바지도 반바지와 긴 바지를 구분해서 보관하는 수준까지 발전한다. 책상서랍 정리와 학용품 보관도 마찬가지이다. 섞여 있던 것들이 구분되면서 체계가 잡히는 것이다.
인간 두뇌의 발달은 분류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한 덩어리를 보고 그것을 세분화하는 것이 분석력이고, 세분화된 것들을 다 묶어 하나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종합력이다. 똑똑하다든지 공부를 잘 한다든지 하는 것은 바로 분석력과 종합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용품들을 나누어서 여러 서랍에 보관했다가(분석) 미술이 든 날에는 이쪽 서랍에서는 크레파스, 저쪽 서랍에서는 스케치북 등을 꺼내 화구 일습을 챙겨(종합) 간다면 학습의 기본 능력이 갖추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생활능력이 키워지면서 뇌는 학습의 기본구도를 갖추게 되고 그럴 때 배운 만큼 안 만큼 실천하면서 사회적 능력이 신장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제 물건을 정리 못해도 눈감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마술의 손을 밑천으로 도전하자
아줌마가 관리해야 하는 서랍은 몇 개런가. 아무리 적어도 식구 수 곱하기 삼은 넘는다. 전담하고 있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다. 부엌만 봐도 열 칸이 넘는다. 그 뿐인가. 동시 다발적으로 이 일을 저 일을 해내야 한다. 전화 받으면서 음식 볶으며, 옆에서 말 거는 아이에게 눈짓과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은 여자들에게 그리 신기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이다.
게다가 머리 속에서는 다음에 할 일, 오늘 해야 할 일, 내일이나 이번 주 안에 들어있는 생일, 제사, 분리수거 요일, 친목계 날짜 등이 왱왱 돌아간다니! 결혼생활 연수와 자녀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마술의 손은 더욱 기적적으로 발달해 있다. 매일 매일 코앞에 닥치고 발등에 떨어져 쌓이는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마술의 손이 된 것이다.
이제 자신의 손이 마술의 손임을 깨닫자. '할 줄 아는 게 이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손'이기에 그것을 밑천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부하자.
집안 일이 사회적 일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일을 구성하는 종합판이기에, 집안 일의 달인은 사회에 세분화되어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의 기초를 '종합적'으로 닦은 셈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믿어주고 칭찬해 주자. 그 능력의 손을 이제 세상 밖으로 뻗자. 망설임이 없이, 자신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