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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천년에는 >

아줌마들아, 우리 가게 하나씩 열자!


"당신은 굉장히 활기차고 신이 난 것처럼 보여서 나까지 괜히 흥분이 되네요. 그 비결이 뭔가요?"
아키아(아줌마가 키우는 아줌마 연대)에서 마련한 강의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다. 빨간 블라우스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50대라고 자기 나이를 밝혔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거워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워요.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고맙고, 이 시간이 아주 신나요."

나는 그들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자고 했다. 금방 답이 나오지 못했다. 여자들은 얼마나 자신에게 무심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나는 그들에게 20대로 돌아가 보자고 했다. 그 때는 자신에게 쏟을 에너지와 시간이 있었을테니. 그러나 역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 또한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기에 자신을 잊고 사는 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드디어 한 여자가 침묵을 깼다.
"일본에 오래 살았어요. 남편 직장 때문에요. 일본말을 제법 했어요.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일본말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꾸준히 일본말을 공부하고 있어요. 그런데 문득문득 이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걸 해서 뭐하나. 그리고 말이란 게 그렇잖아요,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운 거요. 처음에는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이게 날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힘들게 해요. 그러면 이쯤에서 그만 둬야 되겠지요?"

그의 눈빛은 애절했다.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는 일과 헤어지고 싶지만 그랬을 때의 허전함을 채워 줄 다른 것이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역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쳐 주세요. 일본말을 배우고 싶은 이웃 사람들이 왜 없겠어요.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세요. 자신이 배운 일본말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그들이 그것을 익혀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기쁘지 않은가요? 배우고 싶었던 것을 배우면서 행복해하는 그들을 보며 당신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내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이의 얼굴에 이미 행복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오늘 집에 가서 당장 광고문을 붙이세요. 일본어를 가르쳐 드립니다. 무료, 연락처, 선착순 몇 명, 이렇게요. 그러자면 우선 자신이 낼 수 있는 시간을 찾아내야겠지요. 자기의 일정을 짜고 일주일에 몇 번 할 것인지, 한 번에 몇 시간을 할지, 전혀 부담이 안되게 해야 즐거이 할 수 있겠지요."

그이는 이제 수첩을 꺼내 적기 시작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예요. 나와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요. 여기 처음부터 돈이 끼어 들면 부담이 되요. 돈 내는 사람들은 강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강사는 그 요구에 맞추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들지요. 행복하고는 거리가 멀어져요.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이 아마 먹을 것도 좀 싸오고 마실 차도 가져 올 거예요. 넉넉히 가져오면 집에 두고 먹을 수도 있지요. 그게 수입 아니겠어요? 자기 것을 남에게 거저 나눠주는 동안 자신도 일본어를 더 정확히 알게 되고 일본어를 가르치는 기술도 늘게 되겠죠.

방학 때는 아이들을 좀 모아서 가르쳐 보세요. 어린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은 나이 들어서 얼마나 큰 선물이게요. 당신이 일본어를 알고 있음으로 해서 이런 일들이 가능할 때 당신은 일본어를 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고 이것을 계속할 마음이 나지 않겠어요?"

그이는 이제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성단체에도 등록하세요. 일본어 통역으로 자원봉사 할 수 있다구요. 그러다 보면 일본어로 돈을 벌 수 있는 길도 저절로 열릴 거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만족과 보상을 얻는 일, 얼마나 멋진 인생인가요."

등산을 좋아하는 아줌마가 있다. 그이의 직업은 한의사이다. 매일 환자만 보는 그에게 자연은 가장 좋은 의사였다. 단골환자들을 등산길에 초대했고 그것이 입입으로 전해져 거의 매주 일요일 등산을 간다. 동반자들은 수시로 변한다.

"나 혼자 다니면 꾀부리고 게으름 부릴 날이 많겠지? 산에 오르면 함께 간 사람들이 다 나한테 고맙대요. 그런데 사실은 내가 그 사람들한테 고마워. 그들이 있으니까 나도 갈 수 있었던 거니까. 이렇게 서로 서로 나누고 사는 거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그걸 계속하게 되고. 전에는 의학책만 봤는데 이제는 산에 관한 책도 보고 그 근처의 맛있는 음식점들도 알아두게 되고, 자꾸 가지를 치게 되더라구. 이러다가 한의사 그만두고 이 길로 나서는 거 아닌가 싶어. 더 늙으면 정말 그러구 싶어. 그 생각만 하면 늙는 것도 기다려져. 즐거울 것 같애. 그 때를 위해 매주 부지런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녀. 이번 주에는 어떤 사람들이 합류할까 설레임도 있고."

먼저 살던 동네에 채소집이 있었다. 붉은 플라스틱 동그란 그릇마다 여러 가지 나물들이 소복히 담겨 있었다. 그걸 다듬는 30대 아줌마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소복했다.

"나, 어려서요, 소꼽 놀 때 꼭 이렇게 놀았거든. 그릇마다 가득 담아서 졸졸이 늘어놓고 손님 기다리다 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애. 나물을 만질 때 행복하고 사람들한테 담아줄 때 행복하고 단골손님이 오랜만에 와서 반갑게 얘기할 때 행복하고, 난 이게 너무 좋아."

그 때부터 나는 가게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다 가게를 열고 싶다. 일본어 가게, 등산 가게, 수다 가게... 아줌마들이 가게를 하나씩 연다면 세상은 얼마나 풍성하고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까.

주2회 나는 일본어 가게에 간다. 주말에는 옆집 아줌마가 여는 요리 가게에 간다. 일요일에는 한의사 아줌마가 하는 등산 가게에 간다. 토요일 밤에 여는 나의 수다 가게, 단골 손님이 새로 손님을 하나 데려왔다. 나의 단골 손님 중의 하나가 자신이 다음 주부터 뜨개질 가게를 열 거라고 한다. 마침 등산갈 때마다 털모자가 있었으면 했기 때문에 잘 됐다고 좋아한다.

아줌마들아. 뭐든 당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게를 하나씩 열자. 자기도 좋고 남도 좋고 우리 모두 좋아지는 가게를 열자. 거기서 나누고 크면서 행복해지자.

무슨 가게를 열까? 지금부터 생각해 보고 새해에는 시작하자. 아줌마들의 접었던 꿈을 펴는 인생작업실, 가게를 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