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부부 사이? 남편은 사랑채에, 부인은 안채에 따로 살면서 남편은 집안일에 무관심하고 아내는 남편의 바깥일을 묻지 않으며, 부부 사이는 소 닭 보듯 썰렁하고 아내는 부부유별, 삼종지도, 칠거지악, 출가외인 같은 유교 윤리에 매여 오로지 순종과 인내로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만 했단다. 그렇게들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올바른 상식일까?
16세기 선조 때, 유희춘이란 사람이 있었다.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한 고위관리로 훌륭한 글 솜씨에 꼿꼿한 기개를 지녀 왕이 퍽 총애한 인물이었다. 유희춘은 일기를 꼬박꼬박 썼는데, 다음은 그중 한 대목이다.
“부인과 더불어 궁중의 좋은 배를 먹어보니 맛이 퍽퍽하지 않고 시원해서 최고품이라 이를 만하고, 술도 역시 너무 좋아서 서로 칭송하기를 마지 않았다. 부인이 시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눈 속이라 보통 술도 얻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대궐에서 내려주신 황봉주랴
한잔을 마시자마자 얼굴이 붉어오니
태평세월 돌아왔다 그대와 함께 치하하네“
왕이 하사한 배와 술을 아내와 사이좋게 나눠먹고 아내가 흐뭇한 마음에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날의 일기 말고도 유희춘의 일기에는 아내와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시를 주고받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일기에 묘사된 유희춘 부부는 조선 시대 부부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이 밖에서 하는 일을 잘 알고 적극 협력하고 있으며, 남편 또한 아내를 믿고 풍부한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는다. 서로 존중하며 화락하는 모습이 지금의 부부보다 도리어 미덥고 진지하다. 혹시 유희춘 부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그럼, 다른 예를 하나 더 보자.
1998년, 경북 안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집을 짓느라 산기슭을 파다가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무덤 주인공의 가슴에는 한지가 덮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지를 벗겨내어 뒤집어 보았더니, 그건 한글로 빽빽하게 쓴 편지였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원이 아버지께,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무덤의 주인공을 추적해본 결과, 지금부터 약 400년 전인 1586년에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응태라는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응태는 경상도 안동에 살던 양반이었는데, 아내와 어린 원이를 남기고 갑자기 죽었다. 이응태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편지를 써서 남편의 시체와 함께 묻은 것이었다. 편지는 계속되었다.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편지를 쓴 이응태의 아내는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편지에 드러난 이응태 부부의 사랑은 요즘 부부들보다도 훨씬 더 솔직하고 강렬하다.
애정 표현은 고사하고 남편 얼굴 한번 제대로 못 쳐다보고 살았을 것 같은 조선 시대 여성들이 뜻밖에도 남편과 동등하게 마주앉아 시를 주고받거나,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조선 시대 여성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잘못되었거나 과장된 것이 많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적어도 17세기까지는 크게 차별받지 않았다. 삼종지도나 부부유별, 칠거지악 같은 유교 윤리에 그다지 매이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500년 조선 시대 중 절반은 여성이 심하게 차별받지 않았던 것이다. 재산 상속을 어떻게 했는지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재산을 상속할 때는 아들딸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눠주었고, 딸은 결혼한 뒤에도 친정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자기 몫으로 따로 가질 수 있었다.
제사는 아들이 없으면 당연히 딸과 사위가 모셨다. 맏아들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친손자와 외손자를 차별하지도 않아서 외손자가 제사를 모시는 일이 흔했다. 제사 모실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긴다는 이유로 양자를 들이는 일도 없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재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재산 상속과 제사 모시기에 남녀 차별을 두지 않은 건 당시의 결혼 풍습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흔히들 조선 시대 여성은 결혼하면 당연히 시집살이를 하면서 오로지 시집을 위해 헌신했을 거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조선 전기까지는 결혼하면 친정에서 친정살이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친정살이를 하면서 자식 낳아 어지간히 키운 다음 시집으로 가는 것이 삼국 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져온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시조로 존경받은 김종직은 외가에서 태어나 결혼과 함께 처가에 가 살았으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유학자 조식도 외가에서 태어나 자라서 결혼한 뒤 처가에 가서 살았다. 율곡 이이 역시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외갓집 제사를 모셨다. 내로라하는 유학자들이 이러했으니, 일반 백성들이 전통대로 처가살이를 했을 거라는 건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신사임당의 경우를 보자.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모범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자 율곡 이이를 낳아 기른 훌륭한 어머니요, 남편을 바른 길로 이끈 현명한 아내요, 시부모 잘 모신 착한 며느리에다가, 스스로의 재능을 살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조선 시대 여성 시인이자 화가로 손꼽힌다. 신사임당은 수퍼 우먼이었나 보다.
그런데 신사임당의 삶을 눈여겨 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사임당은 강릉 외갓집에서 태어나 거기서 줄곧 살다가 19세에 이원수와 결혼을 했다. 결혼한 뒤에도 시집에 가서 살지 않고 계속 강릉 친정에서 살았다. 혹시 외동딸 아니었냐고? 천만에. 신사임당은 다섯 자매 중 둘째였다.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살면서 딸 셋, 아들 넷을 낳아 키웠다. 신사임당이 친정을 떠나 서울 시집으로 온 것은 결혼한 지 무려 20년이나 된 뒤였다. 그때 신사임당의 나이는 39세. 그로부터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신사임당은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친정에서 산 셈이다. 신사임당의 일생은 결혼 후 처가살이를 하는 전통의 풍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 시집살이는 언제부터 하게 되었을까? 17세기 무렵부터다. 시집살이는 중국에서 들어온 결혼 풍습으로, 신랑이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랑 집에서 사는 것이다. 이를 친영례라고 한다.
친영례는 결혼과 동시에 여성이 남편과 남편의 가족, 친척 중심으로 생활하고 친정과는 멀어지는 특징이 있다. 즉 여성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풍습은 남편이 아내의 집에 와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아내의 가족, 친척 중심으로 생활하는 특징을 갖게 된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결혼 후에도 여전히 친정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집안에서 아내의 위치는 남편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보다 딸을, 남편보다 아내를 심하게 차별하지도 않았다.
유희춘 부부와 이응태 부부, 신사임당 부부는 전통의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유희춘의 아내가 남편과 마주앉아 왕이 하사한 술을 나눠 마시면서 기분좋게 시 한 수를 지어 남편에게 건넨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 이응태의 아내가 평소 남편과 나란히 누워 ‘남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사랑할까요?’하면서 행복해한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신사임당이 수퍼 우먼이 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조건은 바로 여성을 크게 차별하지 않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였다.
곧 두번째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16세기 선조 때, 유희춘이란 사람이 있었다.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한 고위관리로 훌륭한 글 솜씨에 꼿꼿한 기개를 지녀 왕이 퍽 총애한 인물이었다. 유희춘은 일기를 꼬박꼬박 썼는데, 다음은 그중 한 대목이다.
“부인과 더불어 궁중의 좋은 배를 먹어보니 맛이 퍽퍽하지 않고 시원해서 최고품이라 이를 만하고, 술도 역시 너무 좋아서 서로 칭송하기를 마지 않았다. 부인이 시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눈 속이라 보통 술도 얻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대궐에서 내려주신 황봉주랴
한잔을 마시자마자 얼굴이 붉어오니
태평세월 돌아왔다 그대와 함께 치하하네“
왕이 하사한 배와 술을 아내와 사이좋게 나눠먹고 아내가 흐뭇한 마음에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날의 일기 말고도 유희춘의 일기에는 아내와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시를 주고받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일기에 묘사된 유희춘 부부는 조선 시대 부부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이 밖에서 하는 일을 잘 알고 적극 협력하고 있으며, 남편 또한 아내를 믿고 풍부한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는다. 서로 존중하며 화락하는 모습이 지금의 부부보다 도리어 미덥고 진지하다. 혹시 유희춘 부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그럼, 다른 예를 하나 더 보자.
1998년, 경북 안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집을 짓느라 산기슭을 파다가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무덤 주인공의 가슴에는 한지가 덮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지를 벗겨내어 뒤집어 보았더니, 그건 한글로 빽빽하게 쓴 편지였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원이 아버지께,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무덤의 주인공을 추적해본 결과, 지금부터 약 400년 전인 1586년에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응태라는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응태는 경상도 안동에 살던 양반이었는데, 아내와 어린 원이를 남기고 갑자기 죽었다. 이응태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편지를 써서 남편의 시체와 함께 묻은 것이었다. 편지는 계속되었다.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편지를 쓴 이응태의 아내는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편지에 드러난 이응태 부부의 사랑은 요즘 부부들보다도 훨씬 더 솔직하고 강렬하다.
애정 표현은 고사하고 남편 얼굴 한번 제대로 못 쳐다보고 살았을 것 같은 조선 시대 여성들이 뜻밖에도 남편과 동등하게 마주앉아 시를 주고받거나,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조선 시대 여성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잘못되었거나 과장된 것이 많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적어도 17세기까지는 크게 차별받지 않았다. 삼종지도나 부부유별, 칠거지악 같은 유교 윤리에 그다지 매이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500년 조선 시대 중 절반은 여성이 심하게 차별받지 않았던 것이다. 재산 상속을 어떻게 했는지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재산을 상속할 때는 아들딸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눠주었고, 딸은 결혼한 뒤에도 친정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자기 몫으로 따로 가질 수 있었다.
제사는 아들이 없으면 당연히 딸과 사위가 모셨다. 맏아들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기도 했다. 친손자와 외손자를 차별하지도 않아서 외손자가 제사를 모시는 일이 흔했다. 제사 모실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긴다는 이유로 양자를 들이는 일도 없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재혼하는 경우도 많았다.
재산 상속과 제사 모시기에 남녀 차별을 두지 않은 건 당시의 결혼 풍습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흔히들 조선 시대 여성은 결혼하면 당연히 시집살이를 하면서 오로지 시집을 위해 헌신했을 거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조선 전기까지는 결혼하면 친정에서 친정살이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친정살이를 하면서 자식 낳아 어지간히 키운 다음 시집으로 가는 것이 삼국 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져온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사림파의 시조로 존경받은 김종직은 외가에서 태어나 결혼과 함께 처가에 가 살았으며,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유학자 조식도 외가에서 태어나 자라서 결혼한 뒤 처가에 가서 살았다. 율곡 이이 역시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외갓집 제사를 모셨다. 내로라하는 유학자들이 이러했으니, 일반 백성들이 전통대로 처가살이를 했을 거라는 건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신사임당의 경우를 보자.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모범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자 율곡 이이를 낳아 기른 훌륭한 어머니요, 남편을 바른 길로 이끈 현명한 아내요, 시부모 잘 모신 착한 며느리에다가, 스스로의 재능을 살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아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남긴 몇 안 되는 조선 시대 여성 시인이자 화가로 손꼽힌다. 신사임당은 수퍼 우먼이었나 보다.
그런데 신사임당의 삶을 눈여겨 보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사임당은 강릉 외갓집에서 태어나 거기서 줄곧 살다가 19세에 이원수와 결혼을 했다. 결혼한 뒤에도 시집에 가서 살지 않고 계속 강릉 친정에서 살았다. 혹시 외동딸 아니었냐고? 천만에. 신사임당은 다섯 자매 중 둘째였다.
신사임당은 친정에서 살면서 딸 셋, 아들 넷을 낳아 키웠다. 신사임당이 친정을 떠나 서울 시집으로 온 것은 결혼한 지 무려 20년이나 된 뒤였다. 그때 신사임당의 나이는 39세. 그로부터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으니, 신사임당은 일생의 거의 대부분을 친정에서 산 셈이다. 신사임당의 일생은 결혼 후 처가살이를 하는 전통의 풍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 시집살이는 언제부터 하게 되었을까? 17세기 무렵부터다. 시집살이는 중국에서 들어온 결혼 풍습으로, 신랑이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랑 집에서 사는 것이다. 이를 친영례라고 한다.
친영례는 결혼과 동시에 여성이 남편과 남편의 가족, 친척 중심으로 생활하고 친정과는 멀어지는 특징이 있다. 즉 여성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풍습은 남편이 아내의 집에 와 처가살이를 하기 때문에 아내의 가족, 친척 중심으로 생활하는 특징을 갖게 된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결혼 후에도 여전히 친정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집안에서 아내의 위치는 남편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보다 딸을, 남편보다 아내를 심하게 차별하지도 않았다.
유희춘 부부와 이응태 부부, 신사임당 부부는 전통의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유희춘의 아내가 남편과 마주앉아 왕이 하사한 술을 나눠 마시면서 기분좋게 시 한 수를 지어 남편에게 건넨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 이응태의 아내가 평소 남편과 나란히 누워 ‘남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사랑할까요?’하면서 행복해한 것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신사임당이 수퍼 우먼이 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그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조건은 바로 여성을 크게 차별하지 않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였다.
곧 두번째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