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무렵부터 전통의 처가살이는 중국의 시집살이로 바뀌었다. 하지만 완전히 중국식으로 바뀌진 않았다. 전통의 풍습과 중국의 친영례를 적절히 섞어서, 결혼식은 전처럼 신부집에서 가서 하고, 결혼 후 살림은 시집에 가서 하는 새로운 풍습이 생겨났다. 이것을 반친영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통 혼례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 반친영이다.
17세기 무렵부터 달라진 것은 결혼 풍습만이 아니었다. 재산 상속도 바뀌었다. 아들딸 차별 없이 나눠주던 것이 딸에게는 적게, 아들에게는 많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여러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에게 많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제사 모시기도 딸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이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소수 지배층 사이에서만 지켜지던 성리학 윤리가 이때쯤 되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재산을 여러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보다는 한두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재산을 지키고 늘리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된 때문이었다.
결혼과 상속의 변화와 함께 여성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성리학 윤리가 널리 퍼지면서 여성의 순종과 절개가 한층 강조되었다. 그럼 부부 사이는 어땠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하고, 부부는 마치 남처럼 무덤덤하게 살았을까? 강정일당과 윤광연 부부의 삶을 보자.
강정일당과 윤광연 부부는 18세기 말, 정조 때 결혼했다. 둘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서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강정일당은 삯바느질을 하여 살림을 꾸려나갔다.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는데 모두 첫돐 전에 죽고 말았다.
어려운 살림에도 강정일당은 틈틈이 공부를 했다. 남편이 책을 펴고 소리 내어 읽으면 한쪽 곁에 앉아 바느질을 하면서 귀로 듣고 외웠다.
강정일당은 수시로 남편에게 쪽지 편지를 썼다. 한문으로 쓴 편지였다.
흉년이 들어 3일 동안 밥을 짓지 못하다가 간신히 얻은 호박으로 국을 끓여주며 남편에게 쓴 쪽지 편지다. 아내의 살뜰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강정일당은 비록 살림이 어려울지라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남편을 격려했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태도를 고치라고 따끔한 충고를 던지기도 했다.
이런 강정일당을 남편 윤광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강정일당이 61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윤광연은 통곡했다.
윤광연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후 윤광연은 재혼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끝까지 홀로 살았다. 강정일당과 윤광연은 좋은 벗이요,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부부였다. 조선시대 부부 사이, 지금의 부부 사이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17세기 무렵부터 달라진 것은 결혼 풍습만이 아니었다. 재산 상속도 바뀌었다. 아들딸 차별 없이 나눠주던 것이 딸에게는 적게, 아들에게는 많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여러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에게 많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제사 모시기도 딸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아들 중에서도 맏아들이 지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소수 지배층 사이에서만 지켜지던 성리학 윤리가 이때쯤 되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재산을 여러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것보다는 한두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재산을 지키고 늘리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된 때문이었다.
결혼과 상속의 변화와 함께 여성들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성리학 윤리가 널리 퍼지면서 여성의 순종과 절개가 한층 강조되었다. 그럼 부부 사이는 어땠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하고, 부부는 마치 남처럼 무덤덤하게 살았을까? 강정일당과 윤광연 부부의 삶을 보자.
강정일당과 윤광연 부부는 18세기 말, 정조 때 결혼했다. 둘다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살림이 넉넉하지 못해서 윤광연은 서당을 열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강정일당은 삯바느질을 하여 살림을 꾸려나갔다.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는데 모두 첫돐 전에 죽고 말았다.
어려운 살림에도 강정일당은 틈틈이 공부를 했다. 남편이 책을 펴고 소리 내어 읽으면 한쪽 곁에 앉아 바느질을 하면서 귀로 듣고 외웠다.
강정일당은 수시로 남편에게 쪽지 편지를 썼다. 한문으로 쓴 편지였다.
“밥을 짓지 못한 지가 이제 사흘이 되었습니다. 글 배우는 아이가 마침 호박덩굴을 걷어왔는데, 그 속에서 주먹만한 열매 몇 개를 찾아 칼로 썰어 국을 끓였습니다. 술을 한 잔이라도 구해 볼까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단지 국만 끓였으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흉년이 들어 3일 동안 밥을 짓지 못하다가 간신히 얻은 호박으로 국을 끓여주며 남편에게 쓴 쪽지 편지다. 아내의 살뜰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다.
강정일당은 비록 살림이 어려울지라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남편을 격려했다.
“이제 시원한 바람이 부니 바로 독서에 힘쓸 때입니다. 바라건대, 손님 접대를 하고 일을 보는 등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정신을 집중하여 독서를 하십시오. 저도 역시 바느질하고 음식 장만하는 틈틈이, 그리고 밤늦게 잠들 때까지 독서를 하며 연구할 계획입니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태도를 고치라고 따끔한 충고를 던지기도 했다.
“방금 들으니, 당신이 남을 꾸짖을 때는 노여움이 지나치다 하니, 이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남을 바로잡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바르지 않으니 과연 옳은 일이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강정일당을 남편 윤광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강정일당이 61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윤광연은 통곡했다.
“하늘이 나의 좋은 벗을 빼앗아가 버렸다. 지금 이후로 나는 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윤광연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글을 썼다.
“아내가 죽었으니, 의심나는 것이 있어도 누가 그것을 풀어주겠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누가 도와주겠는가? 잘못이 있더라도 누가 바로잡아주겠는가?.....이제 그대가 나를 버리고 떠나고 외롭게 남겨두니, 마치 닻을 잃은 배와 같고 길잡이 없는 장님과 같아서 멋대로 흔들리며 의지할 곳이 없고, 이리저리 넘어지며 갈 곳이 없다......”
그후 윤광연은 재혼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끝까지 홀로 살았다. 강정일당과 윤광연은 좋은 벗이요,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부부였다. 조선시대 부부 사이, 지금의 부부 사이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