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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아침, 중국 상해 홍구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가 열리는 이곳에 말쑥한 차림에 도시락과 물통을 든 한 남자가 들어섰다. 한인 애국단원 윤봉길이었다.

백 미터쯤 뒤에서, 세련된 양장 차림의 젊은 여인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윤봉길이 공원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맞은편 골목으로 사라졌다.
흔히들 윤봉길이 '기모노 차림을 한 일본 여인의 도움을 받아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날 윤봉길을 도운 사람은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이 아니라 양장을 한 27살의 조선 여인 이화림이었다.

이화림은 애국단의 주요멤버로서, 윤봉길과 함께 일본인 부부로 가장하여 거사하기로 했다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을 순 없다며 김구가 간곡히 말리는 바람에 윤봉길의 신변보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화림의 본명은 이춘실.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나 유치원교원학교에 다니던 그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상해로 간 건 25살 때였다.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에 자원한 그는 김구의 신임을 얻어 비서로 늘 가까이서 일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애인사이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이화림은 이때 이봉창과 윤봉길을 만났다. 이봉창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게 던질 폭탄을 훈도시에 숨겼는데, 그 훈도시는 이화림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 후, 이화림은 김구와 결별한다. 테러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사상적 고민'에 빠져서였다. 그뒤 광동 중산대학에서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다가, 김원봉이 만든 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민족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대원이 된 이화림은 생사를 가르는 전투를 치르며 낙양으로, 다시 태항산으로 간다.

태항산. 해발 2,3천 미터를 훌쩍 넘는 산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 모택동이 이끄는 팔로군의 주둔지인 그곳에 이화림이 들어선 건 1941년 7월이었다. 곡식이 나지 않는 산악지대라 조선의용대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부녀대 대장 이화림은 대원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어 김치를 담그고 반찬을 만들었다. 도토리를 주워다 삶아서 가루를 내 먹기도 했다.
하루는, 나물을 캐며 노래를 지어 대원들에게 가르쳐주고 점심 시간에 합창공연을 했다. 민요 '도라지' 가락에 가사만 바꾼 '미나리 타령'이었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이화림은 연안에서 8.15를 맞았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했다. 해방된 조국에 꼭 필요하리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얼빈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북경 교통부 위생부 간부를 비롯해 공직을 두루 거친 다음 은퇴했다.

스무살 꽃다운 시절부터 아흔살 할머니가 되기까지 항일전사로 중국 대륙을 누빈 이화림. 사랑도 꿈도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제 것이라 할 만한 건 모두 조국에 바친 그를 우린 왜 잘 모르고 있는 걸까? 세칭 연안파라고 불리는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남한에선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금기가 되고, 북한에선 숙청 대상이 되어 역사 저편에 묻힌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