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연합 2001.12.27 조회 수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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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의 문정왕후는 반듯하고 냉철한 여성이다. 옳지 않다고 믿는 일에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아비와 동생이 의금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도 정적을 일거에 쓰러뜨릴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좀더 참아야 해,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하며 감정을 고른다.

훈신들의 음모로 쫓겨나는 사림의 영수 조광조를 감싸는가 하면, 어미 잃은 세자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출중한 외모에 영리함까지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난 경빈 박씨보다 몇 수는 더 앞을 내다보는 정치 감각도 있다.

또 다른 드라마 속의 명성황후는 한 서린 여성이다. 어떻게든 아들을 낳아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안간힘은 안스럽기까지 하다. 혹자는 그를 나라를 구하려다 무도한 일본의 칼에 스러진 조선의 잔다르크라고 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드라마 또는 소설과 사실 사이에는 적잖은 거리가 있다. 그 거리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우리의 역사 상식에는 그렇게 해서 '사실'로 둔갑해버린 픽션이 많다. 상식의 오류인 것이다.

문정왕후는 정말 나라와 종사를 위하고 사림과 세자를 보호한 여걸이었나? 그리고 명성황후는 조선을 구하려다 스러진 우리의 잔다르크인가? 픽션을 넘어 사실로 다가가보자.

대권을 향한 집요한 행보

문정왕후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다. 첫 번째 왕비 신씨는 반정공신들 등쌀에 왕비가 되자마자 쫓겨났고, 두 번째 장경왕후는 아들 하나를 낳고 7일만에 죽었으며, 세 번째가 문정왕후 윤씨다. 윤씨는 열일곱에 서른 살 된 중종의 왕비가 되었다.

윤씨는 보위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왕비 자리 또한 보존될 수 있음을 일찍이 깨달았지만, 공주만 내리 둘을 낳다가 17년 만에 아들 경원대군을 낳는다. 그때는 장경왕후 소생의 세자가 장성하여 스무살이 다 되어 있었다.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가 스무살 세자의 경쟁자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 그렇지만 문정왕후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힐 생각이었다. 문정왕후의 이 집요함은 훗날 그를 인종 독살설의 범인으로 지목하게 한다. 대권을 향한 문정왕후의 집요한 행보를 따라가보자.

먼저, 문정왕후는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을 제거한다. 두 눈을 불로 지지고 사지와 꼬리를 잘라낸 쥐새끼를 후원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경빈 박씨의 소행이라 하여 폐서인시켜서는, 끝내 복성군과 함께 사약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일설에, 이 사건의 주모자는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드라마에선 오라비지만, 사실은 동생이다)의 소실인 정난정이었다고 한다. 그 다음, 당대의 권신 김안로를 제거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인종, 곧 중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세자였다.

인종은 학식과 인품, 치자로서의 결단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사림은 인종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런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9개월만에 갑자기 죽는다. 문안 드리러 온 인종에게 문정왕후가 내놓은 찹쌀떡을 먹은 뒤, 심한 이질 증세를 보인 끝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인종이 죽은 건 문정왕후 탓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드디어 경원대군이 보위를 이었다. 그러나 경원대군은 12살, 정치를 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권력의 정점에 앉은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 권력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윤원형에게 밀지를 주어 정적인 윤임 일파에다가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사림들을 이리저리 얽어 숙청해버렸다. 숱한 사림들이 죽고 귀양을 떠났다. 역사에서는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양재역 벽서 사건'을 조작하여 살아남은 사림들을 줄줄이 엮어 내쫓았다.

조선 정치사를 둘로 가르다

7년의 수렴청정을 마치고 아들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뒤에도 문정왕후는 완전한 실세로서 국정을 좌우했다. 그가 실권을 행사한 20년 동안, 조정은 윤씨 집안의 독무대였다. 윤원형과 정난정은 그 20년 동안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 훈척정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총애에 힘입어 정실 김씨를 내쫓고 독살한 다음 정경부인 작호까지 받는다.

문정왕후의 정치역량은 자기 집안의 권력독점을 유지하는 데 집중되었다. 권력의 독점은 부패를 낳고, 부패는 곧바로 민의 피폐로 이어졌다. 의적 임꺽정이 활약한 때가 바로 이때다. 임꺽정이 진짜 의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별문제로 치자. 중요한 건 백성들이 의로운 도적, 탐관오리를 벌 주는 의적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퇴계 이황이 조정에 실망하여 벼슬을 놓고 낙향해서 제자 가르치기에 몰두하고, 남명 조식이 아예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보낸 것이 다 이때였다.

명종 20년, 문정왕후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조선 정치사를 가르는 한 기준이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야 사림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문정왕후가 살아 있는 동안 사림은 중앙정치에 발을 디딜 수가 없었다.
문정왕후는 분명 똑똑하고 강인한 여자였다. 그리고 탁월한 역량을 지닌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의 역량은 자기 자신과 가문의 영화를 위해서만 쓰여졌다. 그 결과 조선의 정치 발전을 한참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민의 설 자리

명성황후는 어떠했던가. 문정왕후보다 약 300년 뒤인 그의 시대는 우리 나라에게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앞에서 나라를 지키고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 어느 세력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과 백성들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역시 그를 부정했으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농민들 또한 민씨 타도를 소리높이 외쳤다.

아무의 지지도 받지 못한 그는 외세에 의존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해주고 그를 재집권하게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지게 한 것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에는 러시아에 의존했다. 무력으로 러시아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 일본은 친러의 핵심인 명성황후를 없애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사건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는 명민한 정치가였다. 조선을 드나든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그를 입모아 칭찬했다.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제거했어야 할 만큼 명성황후의 정치적 영향력은 컸다. 그렇지만 그의 역량 역시 자신과 민씨 정권을 지키는 것에 집중되었다. 민은 거기서 설 자리가 없었다.

문정왕후와 명성황후, 그들의 재능과 경륜은 왜 다수의 민을 위해 쓰이지 못하고 자신과 집안의 복록 유지에만 쓰였을까? 여성의 시야를 좁게만 만들었던 구조 탓인가, 아니면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정권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집권자의 착각 탓인가. 민과 함께 호흡하는 강인하고 명철한 여성상,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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