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연합 2001.12.27 조회 수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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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씨! 다향이 하고 목욕을 다녀올까 하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안돼요."
정희씨가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 뜨고 짧게 대답합니다.

우리가족은 세 사람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정희씨와 이제 막 두 돌을 넘긴 다향이, 그리고 내가 함께 살지요. 다향이도 여느 아이들처럼 물놀이를 좋아합니다.

'다향아, 우리 물놀이할까?'라고 물으면 '안돼'라며 도리질하다가도 막상 목욕물을 받기 시작하면 빨리 옷을 벗기라고 난리를 피우지요.
물을 좋아하는 다향이와 손바닥만하게라고 표현하기에도 옹색한, 그래서 콧구멍만 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우리 집 화장실! 다향이는 그 작은 화장실에서도 신이 나서 팔다리로 물을 텀벙거립니다.

"왜요? 다른 아줌마들도 사내아이들을 데리고 목욕을 다니는데."
"그건 괜찮지만 남자 목욕탕에 여자 애를 데려가는 것은 안돼요."
나는 정희씨의 말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목욕탕에 가려는 이유를 세세하게 설명했지요.

"다향이가 목욕하면서 물을 첨벙거리면 우린 화를 내잖아요? 사실 옷이 좀 젖고 화장실 밖으로 물이 튄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가끔씩은 아이를 목욕탕에 데려가 물장난을 실컷 할 수 있도록 돕고."

하지만 정희씨는 끝내 자신의 반대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여자아이를 목욕탕에 데려가면 남자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 볼 거라고 했습니다. 한술 더 떠서 아줌마들이 사내아이를 성추행 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되묻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다향이와 함께 목욕탕에 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하던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물어 보았지요.
"아들을 얻은 게 그렇게 좋아?"
"그럼, 나중에 함께 목욕하면서 내 등을 밀어줄 놈인데."
그런 이유 때문에 남자들이 사내아이를 원하는가 싶어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며칠 뒤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엘 갔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목욕탕얘기를 꺼냈지요. 사건의 전말을 들은 어머니도 반대를 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와 목욕을 다녀와서 이런 말을 했다면서 말입니다.
"엄마, 아저씨들 잠지에 머리카락이 났어."

하지만 나는 다향이와 함께 목욕탕엘 다녀왔습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육아모임 회원들의 말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지요. 아빠인 내가 다향이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 것이 이상하겠느냐는 물음에 그 분들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뇨. 지금 안 데리고 다니면 언제 데리고 다니겠어요?"

처음으로 목욕탕에 간 다향이는 열심히 잘 놀았습니다. 욕탕에 들어가 물장구도 치고, 할아버지들을 보면 꾸벅 인사를 합니다. 비누 한 번 만지고 세수 대야에 손을 담가 닦아내기를 반복합니다. 제 손에 비누를 묻혀 내 팔을 문지릅니다. 그런 아이를 지켜보는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집니다.

물놀이를 실컷 한 다향이는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흥얼댔습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자아이를 목욕탕에 데려가면 남자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 볼 것'이라던 정희씨의 말이 빙빙 맴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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