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에 ‘헤르메프로다이트(hermaphrodite)’ 라는 자웅동체(雌雄同體) 생물이 있었는데, 두 쌍의 수족과 하나의 커다란 몸체를 가진 생물이었다. 神은 이 생물이 싸우지 않고 완전하게 자기충적인 것이 못마땅했고 질투가 나서, 이 생물을 서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두 부분, 즉 ‘남성(수컷)’과 ‘여성(암컷)’으로 분리시켜 버렸다.
그 순간부터 양측은 서로 티격태격을 넘어서, 한쪽이 다른 쪽을 상처를 주다 못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자행하고, 심한 경우 목숨을 유린하는 비극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는 이 양성(男性-性 對 女性-性)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유사성 보다는, 각각의 性이 파생시키는 문제적 ‘차별성’에 역점을 두었다. 이 차이점(?)에 대한 강조·강화가 오늘날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양성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과 실제적 신화 및 그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 시시껄렁한 그리스 신화의 한토막에 속아서인지 아니면, 성 차별(sexism)과 불평등의 역학 관계에서 권력 쟁취 지향과 그 소유자들의 자작극에 의해서든지 간에, 동서고금을 막론한 이 양성성의 차별성은 그 허상과 실상이 문제로써 발휘되기에 넘쳐난다.
예를 들면 (특히) 우리의 경우, 하루 중에 제일 빈번히 사용하는 말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성급하기로 두 번째에 속하면 서러워할 한국인인 까닭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빨리 빨리” 라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남자가...(어쩌고 저쩌고)” 혹은 “여자가...(어쩌고 저쩌고)”일 것이다. 어째 동의가 되지 않는가?
“얘, 너 남자 맞니? 징징짜고 그래!”, “너는 여자 애가 왜 그 모양이니? 선머슴처럼!”, “ 남자란 말이야...” 혹은 “자고로 여자란...” 등등 열거할라치면 끝이 없다.
그러면 차제에 진중히 생각해보자! 도대체 ‘남자’란 무엇이며 어떤 모습에 역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정체성과 역할 등) ? 아울러 도대체 ‘여자’란 무엇이며 어떤 이미지에 무엇을 하는 존재란 말인가? 이 같은 질문이 등장하면, 의례껏 목청을 돋우어 하는 답변치고는, “아니 남자야 몸집이 크고 힘이 세고, 밖의 일을 하고... 아닌가? (아니네!)” 혹은 “여자야, 체구가 적고 귀엽고 애를 낳고 살림하는... 아닌가? (아니네!)” 뭐 이 정도에 이 따위 것들에 머무를 따름이다.
갈수록 이 같은 질문 조차도 별 의미가 없을 뿐더러, 대답하는 입장들 조차도 궁색에다 안되면 억지로 일관하는 양태이니, 세상이 많이 바뀌기는 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구태의연한 신화에 함몰되거나, 성차별의 양지 혹은 음지에 기생한 채 권력적 단꿀 혹은 피학적(매죠키스트적) 당근에 현혹되어서, 인간 양성의 근본적인 유사성 보다는 ‘차별성’을 불순한 의도로 부각시키어, 그것을 강요하고 동시에 자학적으로 강요당하는 등의 원리(모습)을 볼라치면 솔직히 역겁기 그지없다.
그래도 계속 우기고 싶거들랑, 다음의 사실(내용)들에 대해 속시원히 분명하게 설명해보기 바란다. ①“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 - 나는 그렇게 수없이 부엌을 들락거렸지만, 거시기(?)가 잘 붙어있다! 왜일까? ②“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울어야 한다!” - 나는 이제 큰일났다. 수도 없이 울었으니... ③ 마가렛 미드(Marget Meed)가 쓴 <세 부족사회에서의 性과 기질〉이란 책에 세 부족의 얘기가 나온다. 먼저 산 속에 사는 아라페시족은 남녀 모두 '여성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와 대조적으로 강가의 식인종인 문드그머족의 남녀는 모두 '남성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챰브리족'의 경우는 여성이 중심이 되어 주된 생업을 주관하며, 모든 면에서 여성이 주도적이고 남성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 라고 한다(결국 여기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역전되고 있는 셈이다). ④ 미국에는 300만명이 넘게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도 최근 등장하고 있는 소위 <가사전업남편(house-husband)>, 즉 집에서 살림하는 가운데 주부습진이 걸리고 주부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남편들은 무엇인가? ⑤ 맹렬 여성들이 자아실현과 그 외의 발전 차원에서, 여러분야를 통하여 각개약진을 이루어 나가는데, 이에 역행하는 대상들을 실랄하게 꼬집고 있는 <어리숙한 척 남편 부려먹기> 혹은 <그 많은 여대생들은 어디에 갔을까?> 라는 등의 책을 읽는다면 그 소감이 정말 궁금하다. ⑥ 학교를 자퇴하는 남학생들이 부지기수고 여학생에 비해 자살률은 4배, 살인은 10배, 범죄행위 가담은 15배나 높은 미국 청소년의 현주소 역시 “남성다움의 神話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고 있다.
결론적으로 좀 급진적으로 지적한다면, 이제부터 ‘남자’ 혹은 ‘여자’ 라는 말(命名)과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철저히 허상의 신화적인 그리고 성차별적인 남성(성) 혹은 여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다만)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갈수록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 라는 것이 아닌, ‘사람답다’ ‘인간답다’ 라는, (마치) 중성을 넘어선 <無性> 차원의 용어 선택이나 그 사용이 반드시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급한 일갈로 내달리면, 다소 충격을 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마지막 친절을 베풀고자 한다. 소위 종래의 남자 아니면 여자 라는 이분법적인 가름의 ‘단성(성)’이 아닌 ‘양성(성)’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태동시킨 융(Yung)이 제시한 ‘아니마(anima/ 남성안의 여성상)’와 ‘애니머스(animus/ 여성안의 남성상)’가 그것이다. 이는 “남성에 있어서의 여자다움, 여성에 있어서의 남자다움”이다. 즉 쉬운 말로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 라고 일컫는 대상과 그 특성 등을 망라하는 것이다.
아니마는 본래 라틴어로〈영혼〉을 의미하는 말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융이 <분석심리학>의 용어로서 이용하여, 현재는 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많다. 여성의 경우는 꿈에 남성상이 현상, 그 전형태가 애니머스 (아니마의 남성형태)이다. 남성이나 여성도 외적으로는 사회에 승인되기 위해서(때문에), 이른바 남자답다든가 여자답다고 하는 가면(외적 인격)을 붙이고 있는데, 내적으로는 그 역의 아니마 (애니머스) 의 기능에 의해 마음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남성은 어른이 되는 것에 따라, 자신안의 아니마를 배제하려고 해, 여성은 반대로 애니머스를 배제하는 것에 따라 여자다워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남녀 모두 중년기가 되면(자) 아니마와 애니머스의 통합이 진행되어, 아니마와 애니머스의 양쪽 모두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생각되고 있다. 아니마 (애니머스) (은)는 모두 긍정적, 부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한 한 의식화해 인격의 통합을 도모하는 것이, 개인의 자기 실현의 과정이면(자) 융은 주장하고 있다. 그 과정은 창조적인 한편, 파괴의 가능성도 숨기고 있다.
이 마지막 친절성의 설명과 관련하여, 더 참고할 몇 가지를 보고자 한다. ①제4차 세계(북경)여성대회(1995년)에서 결정한 바, 앞으로 남·녀의 구별은 영어의 'sex'가 아닌 'gender'로 한다. 즉 남자와 여자의 구별을 종래의 생물학?해부학적 차원이 아닌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가름하겠다는 것이다. ②가장 최근에 일본의 性해방운동 차원에서 회자되고 있는 최고의 것은, 소위 <性的 자기결정론(결정권)>이다. 즉나 어느 쪽을 불문하고서도, 그 <性>의 결정은 자기 스스로가 하며, 그것을 자유롭게 행사하겠다는 지극히 강렬한 멧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 필자는 종합하여 종래의 단성성(남자 아니면 여자)을 지나친 양성성을 더 진일보하여, <多性-性>(multi gender)을 상정하고 주장하는 바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의 동성애자들은 물론 <트랜스젠더(trans-gender)>나 <인터-섹스>(inter-sex/ 半陽半陰- 半남성半여성) 등의 대상자들(일명 ‘제3의 성’/ the third sex)까지도 다 포함하는 차원의 명명이나 그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따지고 논하다보니, 종래 우리가 편협(예: 주류 對 비쥬류, 다수 對 소수)하게 혹은 오류로써 갑론을박 했던 ‘남성-성 혹은 여성-성’ 등의 명명이나 특성에 대한 諸담론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구태의연한 것임을 깨닫는 것 또한 각자 혹은 우리 전체의 과제적 몫이다.
그 순간부터 양측은 서로 티격태격을 넘어서, 한쪽이 다른 쪽을 상처를 주다 못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자행하고, 심한 경우 목숨을 유린하는 비극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는 이 양성(男性-性 對 女性-性)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유사성 보다는, 각각의 性이 파생시키는 문제적 ‘차별성’에 역점을 두었다. 이 차이점(?)에 대한 강조·강화가 오늘날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양성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과 실제적 신화 및 그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 시시껄렁한 그리스 신화의 한토막에 속아서인지 아니면, 성 차별(sexism)과 불평등의 역학 관계에서 권력 쟁취 지향과 그 소유자들의 자작극에 의해서든지 간에, 동서고금을 막론한 이 양성성의 차별성은 그 허상과 실상이 문제로써 발휘되기에 넘쳐난다.
예를 들면 (특히) 우리의 경우, 하루 중에 제일 빈번히 사용하는 말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성급하기로 두 번째에 속하면 서러워할 한국인인 까닭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빨리 빨리” 라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남자가...(어쩌고 저쩌고)” 혹은 “여자가...(어쩌고 저쩌고)”일 것이다. 어째 동의가 되지 않는가?
“얘, 너 남자 맞니? 징징짜고 그래!”, “너는 여자 애가 왜 그 모양이니? 선머슴처럼!”, “ 남자란 말이야...” 혹은 “자고로 여자란...” 등등 열거할라치면 끝이 없다.
그러면 차제에 진중히 생각해보자! 도대체 ‘남자’란 무엇이며 어떤 모습에 역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정체성과 역할 등) ? 아울러 도대체 ‘여자’란 무엇이며 어떤 이미지에 무엇을 하는 존재란 말인가? 이 같은 질문이 등장하면, 의례껏 목청을 돋우어 하는 답변치고는, “아니 남자야 몸집이 크고 힘이 세고, 밖의 일을 하고... 아닌가? (아니네!)” 혹은 “여자야, 체구가 적고 귀엽고 애를 낳고 살림하는... 아닌가? (아니네!)” 뭐 이 정도에 이 따위 것들에 머무를 따름이다.
갈수록 이 같은 질문 조차도 별 의미가 없을 뿐더러, 대답하는 입장들 조차도 궁색에다 안되면 억지로 일관하는 양태이니, 세상이 많이 바뀌기는 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구태의연한 신화에 함몰되거나, 성차별의 양지 혹은 음지에 기생한 채 권력적 단꿀 혹은 피학적(매죠키스트적) 당근에 현혹되어서, 인간 양성의 근본적인 유사성 보다는 ‘차별성’을 불순한 의도로 부각시키어, 그것을 강요하고 동시에 자학적으로 강요당하는 등의 원리(모습)을 볼라치면 솔직히 역겁기 그지없다.
그래도 계속 우기고 싶거들랑, 다음의 사실(내용)들에 대해 속시원히 분명하게 설명해보기 바란다. ①“부엌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 - 나는 그렇게 수없이 부엌을 들락거렸지만, 거시기(?)가 잘 붙어있다! 왜일까? ②“남자는 일생에 세 번 울어야 한다!” - 나는 이제 큰일났다. 수도 없이 울었으니... ③ 마가렛 미드(Marget Meed)가 쓴 <세 부족사회에서의 性과 기질〉이란 책에 세 부족의 얘기가 나온다. 먼저 산 속에 사는 아라페시족은 남녀 모두 '여성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이와 대조적으로 강가의 식인종인 문드그머족의 남녀는 모두 '남성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챰브리족'의 경우는 여성이 중심이 되어 주된 생업을 주관하며, 모든 면에서 여성이 주도적이고 남성은 그림자와 같은 존재 라고 한다(결국 여기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역전되고 있는 셈이다). ④ 미국에는 300만명이 넘게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도 최근 등장하고 있는 소위 <가사전업남편(house-husband)>, 즉 집에서 살림하는 가운데 주부습진이 걸리고 주부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남편들은 무엇인가? ⑤ 맹렬 여성들이 자아실현과 그 외의 발전 차원에서, 여러분야를 통하여 각개약진을 이루어 나가는데, 이에 역행하는 대상들을 실랄하게 꼬집고 있는 <어리숙한 척 남편 부려먹기> 혹은 <그 많은 여대생들은 어디에 갔을까?> 라는 등의 책을 읽는다면 그 소감이 정말 궁금하다. ⑥ 학교를 자퇴하는 남학생들이 부지기수고 여학생에 비해 자살률은 4배, 살인은 10배, 범죄행위 가담은 15배나 높은 미국 청소년의 현주소 역시 “남성다움의 神話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일고 있다.
결론적으로 좀 급진적으로 지적한다면, 이제부터 ‘남자’ 혹은 ‘여자’ 라는 말(命名)과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철저히 허상의 신화적인 그리고 성차별적인 남성(성) 혹은 여성(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다만)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갈수록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 라는 것이 아닌, ‘사람답다’ ‘인간답다’ 라는, (마치) 중성을 넘어선 <無性> 차원의 용어 선택이나 그 사용이 반드시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급한 일갈로 내달리면, 다소 충격을 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마지막 친절을 베풀고자 한다. 소위 종래의 남자 아니면 여자 라는 이분법적인 가름의 ‘단성(성)’이 아닌 ‘양성(성)’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태동시킨 융(Yung)이 제시한 ‘아니마(anima/ 남성안의 여성상)’와 ‘애니머스(animus/ 여성안의 남성상)’가 그것이다. 이는 “남성에 있어서의 여자다움, 여성에 있어서의 남자다움”이다. 즉 쉬운 말로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 라고 일컫는 대상과 그 특성 등을 망라하는 것이다.
아니마는 본래 라틴어로〈영혼〉을 의미하는 말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융이 <분석심리학>의 용어로서 이용하여, 현재는 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많다. 여성의 경우는 꿈에 남성상이 현상, 그 전형태가 애니머스 (아니마의 남성형태)이다. 남성이나 여성도 외적으로는 사회에 승인되기 위해서(때문에), 이른바 남자답다든가 여자답다고 하는 가면(외적 인격)을 붙이고 있는데, 내적으로는 그 역의 아니마 (애니머스) 의 기능에 의해 마음의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남성은 어른이 되는 것에 따라, 자신안의 아니마를 배제하려고 해, 여성은 반대로 애니머스를 배제하는 것에 따라 여자다워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남녀 모두 중년기가 되면(자) 아니마와 애니머스의 통합이 진행되어, 아니마와 애니머스의 양쪽 모두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생각되고 있다. 아니마 (애니머스) (은)는 모두 긍정적, 부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한 한 의식화해 인격의 통합을 도모하는 것이, 개인의 자기 실현의 과정이면(자) 융은 주장하고 있다. 그 과정은 창조적인 한편, 파괴의 가능성도 숨기고 있다.
이 마지막 친절성의 설명과 관련하여, 더 참고할 몇 가지를 보고자 한다. ①제4차 세계(북경)여성대회(1995년)에서 결정한 바, 앞으로 남·녀의 구별은 영어의 'sex'가 아닌 'gender'로 한다. 즉 남자와 여자의 구별을 종래의 생물학?해부학적 차원이 아닌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가름하겠다는 것이다. ②가장 최근에 일본의 性해방운동 차원에서 회자되고 있는 최고의 것은, 소위 <性的 자기결정론(결정권)>이다. 즉
이제 본 필자는 종합하여 종래의 단성성(남자 아니면 여자)을 지나친 양성성을 더 진일보하여, <多性-性>(multi gender)을 상정하고 주장하는 바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의 동성애자들은 물론 <트랜스젠더(trans-gender)>나 <인터-섹스>(inter-sex/ 半陽半陰- 半남성半여성) 등의 대상자들(일명 ‘제3의 성’/ the third sex)까지도 다 포함하는 차원의 명명이나 그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따지고 논하다보니, 종래 우리가 편협(예: 주류 對 비쥬류, 다수 對 소수)하게 혹은 오류로써 갑론을박 했던 ‘남성-성 혹은 여성-성’ 등의 명명이나 특성에 대한 諸담론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구태의연한 것임을 깨닫는 것 또한 각자 혹은 우리 전체의 과제적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