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여태 침묵하던 그 할머니는 당당하게 정견(?)을 발표했다.
"딸들은 돈 줄 필요없어. 아들만 주면 돼!"

그러자 옆에 죽 둘러 앉아 있던 딸들 중의 하나가 소리쳤다.
"그러면 엄마 딸네 집에는 왜 다녔어? 집에도 오지 말았어야지"
문중의 부동산을 팔아 수백억을 챙긴 남자들에 대항하여 일어난 '딸들의 반란'을 다룬 티비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와 딸들은 이렇게 패가 갈렸다.

"어쩜 저 엄마는 자기도 여자면서 저렇게 말하냐"
"그러길래, 여자의 적은 여자라잖아. 솔직히 아들 선호하는 것도 할머니, 어머니, 다 여자아냐. 며느리 시집살이도 시어머니 시누이가 전담이구"
이쯤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성여러분, 남자들에게 평등에 동조하라고 하기 전에 여자들끼리 집안단결이나 먼저 이루시지요"

여자라고 해서 모두 의식상태가 똑같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여성차별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는 없다.
여자들 사이에 대물림되는 대사가 있다. 딸:'나는 엄마처럼 안 살아'. 엄마: '너도 시집가서 자식 낳고 살아봐라'

처음부터 붕어빵이 되고 싶은 밀가루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붕어빵 틀에 들어가 일정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등에 비늘모양이 선명하고 꼬리가 만들어져 있다. 꼼짝없이 붕어빵이 된 것이다.

우리가 딸을 차별하는 이 할머니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 이 할머니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안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머니 세대는 여성학이 없었다. 우리도 옛날에 태어났다면 할머니처럼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처럼 되었거나 못 견디고 죽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여성 차별이라는 세상의 법을 그냥 받아안고 살아온 것이 할머니에게는 생존방식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할머니에게 돌 던지기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힘을 새로운 틀을 만드는데 쏟아부어야 한다. 가부장제라는 낚시꾼들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는 붕어빵틀을 깨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 새 틀의 이름을 무어라 지을까. 내가 달리 아는 이름은 국화빵틀밖에 없다. 더 좋은 이름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만들어 가질 수 있다.

요컨대 여자에도 두 부류가 있다. 의식화 된 여성과 의식화 되지 못한 여성. 관건은 우리가 어떻게 여성주체적인 의식화를 이룰 것인가이다. 자기 스스로 이 할머니보다 의식화되었다고 장담할지라도 우리는 더욱 투철한, 완전한 의식화의 길을 평생 걸어가야 한다.

가부장제 문화의 독소는 알게 모르게 우리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가부장제 인푸르엔자는 항상 공기중을 떠돌고 있다. 그러다가 우리가 약해지는 순간 우리 속에 침투한다.

"그래,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말했다. '여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 말은 오늘 우리 땅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이제 여자를 다시 만든다. 여자의 손으로, 여자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