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연합 2001.12.27 조회 수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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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씨, 밥 먹구 가."
"아녜요. 1학년은 12시에 끝나거든요. 빨리 가서 문 열어놓구 애 밥줘야 되."

"정님씨, 밥 먹구 가. 어차피 점심은 어디서든 먹어야 할 거 아냐?"
"약속 있어요. 다음에........."

"인정씨, 밥 먹구 가."
"............................"

"그 집이야, 1학년 짜리도 없구, 약속 있어?"
"아녜요, 애가 딸려 있어서.........."
그는 등에 업은 네 살짜리 아이를 가리킨다.

"그 애가 어때서? 여기서 밥 먹이구 가. 가서 혼자 먹으면 밥은 맛없다."
"놔두세요. 집에 뭐 맛있는 반찬 있어서 혼자 먹을려구 그러나 보죠."

누군가의 말에 인정씨는 펄쩍 뛰며 자리에 앉는다. 민우회 회원들의 정기적인 모임이 끝나고 나면 벌어지는 풍경이다. 주부들의 시간이 항상 조각인지라 아침에 애들 보내고 잠깐 틈내서 두어 시간 만나고 나면 회포를 풀 새도 없이 또 뿔뿔이 흩어진다.

인정씨가 밥을 먹고 간 다음날 인정씨를 신입회원으로 소개한 중견회원 한 명이 내 소매를 은근히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어제 우리가 밥 먹구 가라구 막 그랬잖아요. 인정이가 그런게 너무 고마웠대요. 자기는 절대 어디가서 밥 안 먹구 온대요. 애가 딸리니까 어디가서 맘 편히 앉아있기도 어렵구 괜히 눈치가 보이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구요. 걔가 첨에는 여성운동하니까 되게 겁먹구 쫄았더라구요. 괜히 남편하고 사는 게 힘들어지거나, 쌈순이 될까봐요. 그러더니 '이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민우회인 것 같다'구 감동해서 난리예요."

이웃 여자들과 형님 아우하며 오지랖 넓게 사는 그는 인정씨를 제 친정동생 말하듯 했다.

밥이라는 것에는 참으로 묘한 힘이 있다. 옛날부터 밥은 사람들을 엮는 중요한 고리역할을 해왔다. 시골집 마당을 연상해 보라.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툭 트인 대청마루에서 두레반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삽짝 너머 이웃집 개똥어멈이 지나간다. 요즘은 밥 먹을 때 쳐다보면 실례지만 그 때는 이 집과 삐친 게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들여다보게 마련이다.
"어디가? 들어와서 밥 먹구 가. 들어와."

'밥 먹었어'하면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어선다. 그는 마루 끄트머리에 반만 걸쳐 앉는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 가는 거야?"
"아, 저 위에 논물 보러 가는데 지난 밤에..........."

동네에서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주르르 나온다. 이게 바로 동네 리포터, 살아있는 뉴스인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다가 시선이 밥상에 이른다.

"이 김치가 저번에 그 밭에서 솎은 배추인가?"
"그래, 새로 나온 종자로 하도 좋다고 해서 이번에 갈아봤는데 맛이 괜찮네."
자연스레 젓가락이 오가고 김치가 짜다보니 밥 한술이 빠질 수 없다.

한 술 주면 정 없다고 두 술이 오는 바람에 밥은 금새 한 사발이 된다. 두레반의 좋은 점은 상석 말석이 없으려니와 한 두명쯤은 금새 끼워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밖에 또 한사람이 지나간다. 이번에는 손님이 부른다. '나도 있으니 어서 들어오라고'

"즈이 집에는 밥이 없나. 논물 보러 간다더니 논이 이 집 마당에 있나 원.........."하면서 그 역시 들어온다. 먼저 온 손님이 새로 온 손님에게도 밥을 주라고 주인에게 청하고 이제는 두 사람 다 마루에 편히 올라 앉아 밥을 먹는다. 먹고 왔지만,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사람 사는 정을 나누느라 앉아서 밥을 먹는 것이다.

밥을 먹으며 이야기가 오간다. 자식이야기, 반찬이야기, 농사이야기, 제사이야기, 이웃집 아무개네 이야기,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

아이들도 학교에서 돌아와서 엄마가 논일 들일 나가고 없거나 멀리 외가에 경조사가 있어 가고 없으면 이웃집에서 밥을 먹는다. 밥 때에 어느 집에 놀러갔다면 게서 밥을 먹고 오게 마련이다. 밥은 수시로 품앗이가 이루어진다. 어찌보면 동네 전체가 밥을 교환하고 사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밥 먹는 모습을 외부에 노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밥 먹을 때 쳐다보거나 방문하는 것은 실례이다. 아이들에게도 교육시킨다. 친구집에서 놀다가도 밥 때가 되면 잽싸게 집으로 오라고. 저녁밥 때가 되어서도 놀러 온 아이들의 친구가 가지 않으면 언질을 줘야 한다. "얘, 너네 엄마가 기다리시겠다. 어서 집에 가서 저녁 먹어야지."

그리고는 아는 사람들에게 쉽게 말한다. "언제 같이 밥 한 번 먹자구." 사람과 밥을 먹는 일이 매개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리 쉬운 일상적인 일은 되지 못한다. 아주 큰맘먹고 별러서 정식으로 초대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손님을 치루고 나면 온 몸이 아프고 가계부에 적자가 나고 그리하여 '밥 같이 먹는 일'은 보통 일에서 벗어난다.

여자들끼리 밥 먹는 모임이 유행하는 건 사실이다. 밥이야 만인의 공통 관심사이니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만남의 프로그램이며 가장 부담없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일에 치인 여자들의 밥 먹는 모임이 음식점을 순례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상은 '앉아서 받아 먹는 밥'이라지 않는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상의 밥이다. 일상의 밥을 나눌 때 사람들은 서로의 일상에 개입하게 되고 일상적인 관계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이벤트성의 밥도 좋지만 그보다는 일상의 밥이 더 큰 힘을 갖는다.

예로부터 한솥밥이라는 말이 있다. 한솥밥을 먹고 산 사이라고 하면 이것은 가족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여자들의 조직 중에는 밥을 해먹는 곳이 많다. 우리도 밥을 해먹는다.

우선은 사먹는 밥값을 당할 수 없어서였지만 이렇게 밥을 해먹다 보니 우리도 모르게 얻어지는 '한솥밥 공동체 정서'에 눈을 뜨게 되자 그 맛에 귀찮은 노동의 과정을 기꺼이 감수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밥이 혼자 먹는 밥이라고 한다. 주부들의 점심식사는 외롭고 맛없을 수 밖에. 반찬이 없어도 여럿이 모여 먹으면 맛있는 이치는 어디에 있을까. 함께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것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밥을 한다. 그리고 오가는 회원들을 불러 세운다.
"밥 먹구 가."

자기 집에서 인기없어진 반찬들을 들고 온다. 공동체의 밥상에서는 그것들이 신선한 메뉴로 부활한다. 그 반찬 하나에 친정어머니 손맛의 내력이 나오고 그 반찬 하나에 시골집에 가게 된 사연이 나오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서로의 인생에 얽혀 들어 하나의 덤불을 이룬다. 거기에 꽃이 피고 새가 날아오고.......

밥을 나누자. 잘 차린 손님상이 아니라 내가 먹는 매일의 밥상에 언제라도 숟갈 하나를 더 놓는 여유를 회복하자. 솜씨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마주앉기 위해 그와 삶을 나누기 위해 밥상에 청하자.

"밥 먹구 가, 제발!"